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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Oct 09. 2017

그림이 일으키는 파문

미술관 여행을 하는 이유 

여행이 끝났다. 더 이상 하루에 8-9km씩 걷지 않고, 내가 원활하게 들이마시고 내뱉을 수 없는 낯선 언어로 가득 찬 숨 막히는 레스토랑에서 초조하게 밥을 먹지 않는다. 구글맵이 보여주는 길과 눈 앞에 펼쳐진 길이 일치하는지 가늠해보느라 스마트폰과 손 붙잡고 걷지 않으며, 편의점에서 은색, 동색 동전을 한 움큼 손바닥에 올려놓고 값어치를 따지느라 뒷사람을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지친 몸을 털썩 뉘일 바삭하고 새하얀 침대 시트가 기다리고 있지 않고, 미묘하게 다른 결과 색을 가진 온갖 치즈, 육류, 빵들만 반듯하게 놓여있는 묵직한 아침상 앞에서 마른 목을 축여가며 열량을 채워 넣을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어디서 왔니?"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된다. 


떠나 있는 동안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됐다. 


여행 내내 이 모든 '유난'을 떠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왜 많은 돈을 들여가며, 연이은 마감으로 어깨와 허리 근육 겹겹마다 피곤이 스며든 육신을 이끌면서까지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화가들의 그림을 보겠다고 난리인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음악이나 문학이 아니고 그림인가.

왜 프랑스나 이탈리아나 미국이 아니고 북유럽인가.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위의 두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답은 막연한 직관과 끌림의 모습으로만 존재했다. 익숙한 일이다. 살아오는 내내 직관의 속도는 이성의 속도보다 지나치게 빨랐다. 직관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 나면 뒤늦게 이성이 허덕허덕 쫓아와 간신히 이해하는 식으로 삶이 이어졌다. 이해하기 전에 먼저 선택하는 건 나에게 익숙한 일이다. 

직관이 시키는 대로 2015년 10월에 코펜하겐으로 첫 북유럽 미술관 여행을 떠났고, 2016년 1월에는 오슬로, 베르겐, 스톡홀름, 모라, 헬싱키에 있는 미술관에 갔다. 2017년 10월은 예테보리, 말뫼, 스카겐, 올보르그, 라네르스, 오르후스 미술관이 목적지였다. 



그림과 마주하고 서면 이성이 잦아들고 감성이 몸을 일으킨다. 영혼으로 돌진해 와 부딪히는 그림 앞에선 언어를 잃는다. 알아챌 겨를 없이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어 위로는 맑은 물이, 아래로는 부옇게 앙금이 가라앉은 웅덩이 속에 손을 쑥 집어넣어 휘휘 뒤적인다. 오랫동안 내 안에 고여있던,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공간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림이 일으킨 부연 물보라를 가만히 품고 방으로 돌아와 기록한다. 기록하기 위해 만지작거리고 곱씹고 되새긴다. 그렇게 감각과 언어 사이, 직관과 이성 사이의 시차를 줄여간다. 


여행을 마친 지금은 답할 수 있다. 왜 문학이나 음악이 아니고 하필 그림인지, 왜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이 아니고 북유럽인지. 몇 천 킬로미터를 이동해 겨우 그렇게 됐다. 앞으로 천천히 써내려 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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