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빈드 토세테르 <구멍>
to 에디터C
어릴 때부터 뭘 잘 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어요. 성적이 특별히 좋지도 않았고 음악이나 미술 등을 유별나게 좋아해 몰입해 본 경험도 없습니다. 성적에 맞춰 진학한 대학교를 졸업해 박봉을 견디며 회사 생활을 겨우겨우 하고 있어요.
언변이 뛰어나지도 못하고 성격도 내향적이라 모임에 참석하면 '있었는 줄도 몰랐던 애' '존재감 제로의 기타 등등'으로 여겨지기 일쑤입니다. 가장 두려운 건 소개팅에 나갈 때입니다. 흔히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잘난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세상에서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이런 제가 어떻게 하면 남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사실 작은 키가 오래된 콤플렉스라 키 크는 수술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습니다. 위험한 수술이라는 건 알지만 이 수술을 하면 좀 더 자신감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군가 여러분께 "당신 삶의 구멍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한다면 뭐라고 답할 것 같으세요? 아마도 외모나 체형, 학벌, 굴곡 많은 가정사, 소심한 성격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답이 나올 것입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제 삶에 구멍 같은 건 없는데요?"라고 반문할 사람은 아마 단 한 명도 없을 거란 사실입니다.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감을 느낍니다. '내가 이랬으면 좋겠다. 더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이런 열망은 있습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에 100% 만족한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하지만 문제는 그 스스로에 대한 이상향이 진짜 내 것이 아닌 경우, 주입받은 쭉정이 열망인 경우도 많다는 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드는 이런 사회 안에선 무엇 하나 모자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이 커지고, 모든 면에서 골고루 다 잘 하고 완벽해야 한다는 불안은 '현실의 나'를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걸 방해합니다.
자기 자신과 대화하며 '내가 가진 것 vs 가지지 못한 것' '내가 진짜 갖고 싶은 것 vs 갖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는 것'을 차분하게 셈하기보다는 남과 비교해 모자라다고 느껴지는 것들-내 삶의 구멍들-을 채워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커지죠. 그 과정에서 평범한 것들의 가치는 쉽게 평가 절하되거나 무시됩니다.
사실 우리가 갖는 열등감이나 콤플렉스 중에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주어진 운명' 같은 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키나 외모가 그렇고, 부모님과 형제도 우리가 선택해 태어난 게 아니죠. 유년기 상처로 인한 콤플렉스 역시 자의와 상관없이 그냥 주어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런 것을 두고 '나는 왜 이럴까' '왜 다르게 되지 못했을까' 파고들면서 이유나 의미를 찾으려고 애썼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고통만 커지더군요. 그럴 땐 그냥 쓴 약을 꿀꺽 삼키듯 '구멍'을 내 삶의 일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낫다는 것을 어렵사리 깨우쳤습니다.
그 과정에 대한 은유를 담은 책, 어이빈드 토세테르의 <구멍>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책 가운데 작은 원이 보입니다. 실제로 책을 관통하는 구멍입니다. 턱을 괴고 고민에 빠진 주인공에게 어떤 일이 생긴 걸까요.
주인공은 이제 막 한 아파트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삿짐을 풀던 중 벽에서 구멍을 발견합니다. 네, 표지에서 본 바로 그 구멍입니다. 책을 관통해 실제로 뚫린 이 구멍은 각 지면 안에서 맥락에 따라 모습을 바꿔갑니다.
주인공이 사태를 파악하려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니 그 사이에 구멍은 세탁기 문에 있는 유리창이 되었고, 다른 페이지에서는 구멍에 걸려 넘어질 뻔 하기도 합니다.
해결방법을 모색하던 주인공은 수소문 끝에 구멍의 정체를 파악해보겠다는 한 실험실과 연락이 닿게 됩니다. 문제는 그 실험실까지 구멍을 가져가야 한다는 거였죠. 살금살금 구멍에 다가가 순식간에 이삿짐 박스 안에 구멍을 담아서 테이프로 꽁꽁 봉합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박스를 들고 나가 실험실로 향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제가 이 책의 백미라 느꼈던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아파트 밖으로 나와 실험실로 가는 길, 그 풍경 안에서 구멍은 휘파람 부는 우체부의 입이 되었다가, 호텔 간판 속 알파벳이 되었다가, 공사가 벌어지는 맨홀이 되었다가, 풍선 장수의 풍선이 되었다가, 지나가는 자동차의 타이어에서, 신호등의 불빛, 스쳐가는 행인의 눈매, CCTV의 렌즈, 지하철에서 마주친 한 아이의 콧구멍이 되기도 합니다.
총 66페이지나 되는 꽤 두꺼운 책이기에 위의 장면들 말고도 구멍의 기발한 변신을 표현한 장면이 무척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책의 후반부는 실험실에서 구멍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연구자들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담겨 있어요. 실험이 진행되던 중 날이 저물어 밤이 되고, 연구자가 주인공에게 "구멍은 여기 실험실에서 보관하면서 계속 연구하겠습니다. 실험 결과에 대해 종종 연락드리죠."라고 말하며 주인공을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집에 돌아와 발코니에서 따뜻한 차 한 잔과 책 한 권을 즐기며 보름달을 감상하던 주인공은 밤이 늦은 것을 깨닫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합니다. 그리고 책의 가장 처음 장면에서처럼, 구멍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구멍'이라 여겼던 것들이 다양하게 모습을 바꿔가며 드라마를 만드는 중간 부분과 구멍을 그냥 자신의 삶의 배경으로 받아들이는 마지막 주인공의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큰 갈등이나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프랑스 영화가 따분하듯, 사연 없는 인생도 저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더라고요.
구멍으로 상징되는 열등감의 원인들이 한편으로는 고통의 이유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삶의 의미도 찾아지고 개성이라는 것도 꽃 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 삶에 구멍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우선 그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인지 파악하고, 자의와 상관없이 주어진 운명 같은 구멍들에 대해선 생각의 관점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 구멍이 나만의 드라마를 만들어 줄 시나리오 초고다.'라고 생각해보는 거지요.
그 시나리오를 어디로 끌고 갈지, 어떤 장르로 창작해낼지는 각자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구멍이 무조건 나쁘기만 하고 없애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인생의 칼자루를 쥔 게 자기 자신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겁니다.
구멍은 내 뜻과 상관없이 나에게 찾아왔지만, 그 구멍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한 그림책은?
어이빈드 토테세르 <구멍> http://goo.gl/DYaS8u
글을 쓴 최혜진은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하며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1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가 3년 동안 살며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명화가 내게 묻다><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썼고, 현재는 <볼드저널>의 콘텐츠디렉터로 일한다. 그림책이라는 놀라운 예술 장르에 매료된 자발적 마감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