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행성에 살고 있어> x <사람, 장소 환대>
상상해보자. 당신은 한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파티가 열리는 장소는 처음 들어본 미지의 장소다. 동행은 없다. 참석자의 면면도 알지 못한다. 파티장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분위기가 어떨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있을지, 식사로 어떤 메뉴가 나올지, 사람들 옷차림은 어떨지 아는 바가 없다. 파티 참석자들이 활짝 미소 지으며 당신을 반겨줄지, 경계하며 눈을 흘겨볼지, 혹은 대놓고 따돌릴지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당신이 파티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 뿐이다.
여기까지 읽고 난 뒤 당신의 반응은? 파티에 어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드시는지? 소심한 허약체질 어린이로 태어나 식은땀 치료용 영양제 ‘키디’를 노상 입에 달고 살았던 나는 분명 파티장에 입장하자마자 탈출할 궁리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초대장을 건네준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거기에 모인 사람들 모두 너를 좋아해. 너와 친해지고 싶어해. 너는 분명 환영받을 거야. 게다가 들어가면 네 이름이 적힌 의자가 있어. 곧장 그리로 가서 앉으면 돼.”
한결 마음이 누그러든다. 조금 설레기도 한다. 낯선 장소이긴 해도 내 자리가 분명하게 보이고, 그곳에 모인 사람이 나에게 우호적일 것이란 약속을 받았으니까. 전자의 경우가 가드를 올리고 보호 본능을 발휘하게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호기심과 탐험심을 자극한다.
“나의 아들, 할런드에게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첫 두 달 동안 어떻게 하면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이 책을 썼단다. 네게 꼭 알려 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이 책에 담았단다.
- <우리는 이 행성에 살고 있어> 서문”
우리 모두는 아주 오래전에 미지의 파티장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의지와 상관없이 바로 여기, 이 행성에 ‘도착’한 순간 말이다. 우리에게 초대장을 건네준 부모가 파티장을 어떻게 소개하는지(부모의 세계관)에 따라 세계는 잔뜩 경계해야 하는 무시무시한 곳처럼 보이기도, 마음 놓고 탐험할 수 있는 우호적 장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 행성에 살고 있어>는 북아일랜드 국적의 그림책 작가 올리버 제퍼스가 자신의 자녀를 위해 만든 사려 깊은 초대장이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법’이라는 부제처럼 책은 우리별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있다. 가장 먼저 드넓은 우주 공간 안에서 지구의 크기가 얼마나 작은지 알려주며, 지구를 구성한 육지와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준다. 창공의 별자리, 달, 구름과 그 아래 흐르는 비와 바람과 번개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다음은 사람. 우리의 신체구조를 귀여운 해부도로 보여주면서 뇌, 심장, 폐, 뼈가 하는 일을 알려준다. 얼핏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논픽션 그림책처럼 보이지만, 책장을 뒤로 넘길수록 신기하게도 머리가 채워지는 게 아니라 가슴이 천천히 데워진다.
“사람들은 몸매도 몸집도 피부색도 다 달라.
생김새도 다르고, 행동도 목소리도 저마다 다르지만,
그래도 다 같은 사람이야.”
“지구에는 동물들도 살고 있어.
동물들은 사람보다 훨씬 모양도 크기도 색깔도 다양해.
동물들은 말을 못하지만 친절하게 대해 줘야 해.”
두 문단은 각각의 펼침면을 사용하는데, 두 펼침면의 레이아웃은 동일하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사람들 수십 명과 동물들 수십 마리가 공평하게 펼침면을 나누어 쓴다. 인종, 성별, 종교, 국적, 체형, 나이, 직업, 외모가 하나도 같지 않은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시선을 던지다가 책장을 넘기면 이번에는 개성적 외양의 동물들이 더없이 사랑스러운 그림체로 그려져 있다. 자연스럽게 시야와 생각이 열린다. 아! 이 세상에는 나 말고도 정말 많은 생명체가 있구나. 다들 참 사랑스럽구나!
책은 뒤로 가면서 추상적 개념인 시간까지 아우른다. 낮과 밤이라는 개념에 대해, 자의적으로 느껴지는 시간의 속도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속성에 대해 말한다. 그렇게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다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독자 눈앞에 들이민다.
“이제 또 궁금한 게 생기면…
물어보면 돼. 나는 늘 네 곁에 있으니까.
만약 내가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돼.
넌 결코 혼자가 아니니까.”
처음 이 장면을 보고 전율했다. 눈물도 찔끔 났다. 그림 속에서 아빠가 된 작가가 작고 연약한 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 아이에게는 “내가 없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렴”이라 말하고, 강보에 싸인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눈빛으로 타인을 바라본다. 그 뒤로 끝없이 이어진 줄이 보인다. 인종, 성별, 종교, 국적, 체형, 나이, 직업, 외모가 하나도 같지 않은 사람들. 새로 도착한 생명을 환대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배후에 서기 위해, “내가 너의 뒤에 있어. 안심해!”라고 말해주기 위해,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우리, 인류 공동체.
아무리 부모라도 자녀가 살아가며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준비해 줄 수는 없다. 결국 세계를 직접 대면하고 겪어나갈 주체는 아이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세계와 타자와 공동체에 대한 신뢰 아닐까? 이 세상은 참 멋진 곳이라고, 지켜야 할 소중한 게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고, 그들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라고…. 맘껏 궁금해하고 질문하고 탐험하기를 독려하는 초대장을 보내듯 말이다.
<우리는 이 행성에 살고 있어>를 읽고 나면 행성에 도착한지 40여 년이 지난 ‘낡은 사람’도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보게 된다. 끝을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우주 가운데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가 나의 자리임을 곱씹게 된다. 생각이 멀리까지 나아간다. 나는 유약하고 의지박약이지만 나와 연결된 존재들이 아주 많기 때문에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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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읽을 인문서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올리버 제퍼스가 <우리는 이 행성에 살고 있어>에 담아내려 한 ‘생명에 대한 전적인 환대'와 ‘장소성’의 의미는 인문학자 김현경이 쓴 <사람, 장소, 환대>를 읽고 나면 더욱 크게 와닿는다. 다소 어려워 보이는 사회학 개념을 그림책 안에서 시각적, 직관적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울 정도다.
“책의 키워드는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이다. 이 세 개념은 맞물려서 서로를 지탱한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으로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 <사람, 장소, 환대> 프롤로그 중
“환대란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서 현상하고 있음을 몸짓과 말로써 확인해주는 행위라고 말하기로 하자.”
- <사람, 장소, 환대> 6장 절대적 환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