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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Sep 22. 2015

[그림책 처방] 열정이 생기지 않아요

이브 번팅, 낸시 카펜터 <커다란 곰의 커다란 배> 


to 에디터C 


열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대학교 때 피아노를 전공한 27세 여성입니다. 보통 피아노과 학생들보다 출발이 늦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원하던 대학교에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저만의 목표를 향해 누구보다 연습을 열심히 한 청소년기를 보냈어요. 

그런데 대학교 3학년 때부터 무기력증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습니다. 예쁜 것이나 재미있는 것을 봐도 마음이 크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인이 추천을 해줘서 필리핀으로 2개월간 어학연수를 다녀왔는데, 그곳에서는 힘들긴 해도 열정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굉장히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 수 있었어요. 

문제는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는 그때처럼 살지 못한다는 겁니다. 다이어트, 영어 공부 등 이루고픈 목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열심히 하지 못하고 뭐든 미루기만 합니다. 사진을 찍어보겠다며 필름 카메라를 구입해놓고 며칠 안 가서 흥미가 식어 서랍에 방치하는 식입니다. 언제인가부터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이건 돈 모아서 나중에 하자'고 스스로를 달래 놓고, 막상 돈을 다 모으고 나면 보상을 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항상 과정을 즐긴다는 말과 상관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피아노를 제외하고요.




그림책 처방 

그 욕망, 진짜 자기 게 맞나요? 


욕망이라는 단어는 조금은 불온하고 삐딱해 보이지만 지금 당장 무언가를 저지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팍팍한 일상 속에서 불현듯 자신이 살아 있음에 느끼게 하는 것들, 욕망을 심어주는 것들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진정 원하는 것이 무언지 발견할 수 있죠. 

<나의 방식으로 세상을 여는 법> 저자 박승오는 자신이 어떤 것들에 욕망을 느끼는가 알고 싶다면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라고 권합니다.   


* Do -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때 살아 있음을 느끼는가? 무엇을 하면 진짜 행복할 것 같은가? 

* Go- 나는 어떤 공간에 있을 때 살아 있다고 느끼는가? 왠지 가보고 싶고 끌리는 장소는 어디인가? 

* Have- 나는 어떤 것을 가졌을 때 기쁨을 느끼는가? 무엇을 소유했을 때 기쁨을 느꼈는가? 돈이라고 적기보다 구체적인 소유물을 적자.

 * Be- 직접 만났거나 책이나 영화, TV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된 사람 중 끌렸던 사람은 누구인가? 그 인물의 특징 가운에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닮고 싶은가?


그런데 욕망이라는 녀석이 좀 까다로운 데가 있어요. 분명 내 욕망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내 것이 아닌 '쭉정이 욕망'도 마구 섞여 있거든요. 가족, 또래 커뮤니티, 매스컴 등 이곳저곳에서 '좋다'고 떠들면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욕망을 내면화해서 제 것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지요. 또 누군가를 흉내내고 싶어서 생긴 욕망도  있을뿐더러 어떠한 일을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시한 채 그저 누리는 혜택만을 동경하는 것 또한 가짜 욕망이니 이 또한 걸러내야 하고요. 


흥미가 금방 식은 다이어트, 영어공부

vs. 

열정이 꾸준히 이어지는 피아노. 


이 차이가 말해주는 건 뭘까요? 



주입받은 욕망 

이브 번팅이 글을 쓰고 낸시 카펜터가 그림을 그린 책 <커다란 곰의 커다란 배 Big bear's big boat>는 이 듀오가 2003년 발표한 <꼬마 곰과 작은 배>의 후속작입니다. 

호수에서 작은 배 타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던 꼬마 곰이 성장하며 몸집이 커져 정이 든 작은 배를 떠나야만 하는 순간을 그려낸 책입니다. 변화가 두려워 억지로 작은 배에 몸을 욱여넣는 대신 옛것과 이별하고 변화를 선언하는 용기에 대한 작품이었습니다. 

두 번째 편인 <커다란 곰의 커다란 배>에서 이제 주인공 곰은 자기 몸에 맞는 커다란 배를 손수 만들기로 합니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작은 배와 똑같은 생김새로 크기만 키운 파란 보트를 손수 만든 후 행복감을 느끼는 곰. 배를 끌고 호수로 나가는데 비버가 말을 겁니다. 


"와, 정말 멋진 배구나. 그런데 이 정도로 큰 배에는 돛대가 필요한데, 너 몰랐어?" 


돛대를 달고 있는 곰에게 이번엔 수달이 말합니다. 


"이렇게 멋지고 큰 배에는 상판이 있어야지. 그 위에 앉아 노을도 보고 달도 구경하려면 말야. 다른 큰 배들은 모두 상판이 있는 걸."    


상판을 만들고 있는 곰에게 파랑 왜가리가 다가옵니다. 


"진짜 멋진 배를 만들었구나! 그런데 들어가서 잘 수 있는 선실이 필요하지 않겠어? 다른 큰 배들은 다 선실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곰은 이렇게 답합니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이 강압적으로 참견을 한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서 배에 돛대, 상판, 선실을 더하기로 본인이 선택을 한 것이었죠.  

그렇게 최종 완성된 보트 앞에 선 곰의 표정을 작가는 이렇게 그려냈습니다. 이 책의 백미인 장면입니다. 



눈 앞의 결과물을 보고 나서야 곰은 깨닫습니다. 이건 자신이 바라던 배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걸요. 이윽고 친구들을 찾아가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도와주고 싶었던 건 잘 알아. 고맙게 생각하고. 그런데 나는 단지 몸이 커진 것일 뿐, 좋아하는 것은 똑같아. 나는 늘 이런 곰이었다고. 이 배는 내가 꿈꾸던 배가 아니야." 

그리곤 선실, 상판, 돛대를 모두 떼어낸 뒤 자신이 사랑했던 모습을 되찾은 소박한 배 위에서 눈을 감고 호수의 물결을 가만히 느낍니다. 행복을 느낍니다. 




실망해도 괜찮아요 

이번 고민 메일을 읽으면서 저는 그 안에 낮게 깔려 있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이어트든 영어공부든 매사 열정적으로 목표를 이뤄내며 살았으면... 무언가를 하나 시작했으면 끝을 보았으면... 이런 식의 스스로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데 현실의 자신이 그걸 채워주지 못해 실망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질문하고 싶습니다. 열정을 계속 불사를 수 있는 분야만 한 번에 콕콕 집어내는 게 가능한 일인가요? 실망하는 경험 없이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아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요? 


해보기 전에는 자신의 욕망이 진짜 자기 것인지  주입받은 쭉정이 욕망인지 골라내기 어렵습니다. 대신 직접 한 번 해보면 순식간에 압니다. 분명 해보기 전에는 진짜 좋아하는 일이었는데, 막상 해보니 평가가 바뀌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건 변덕이 아닙니다. 그저 과정인 거죠. 

<커다란 곰의 커다란 배>의 주인공 곰이 '이건 내가 바라던 배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건 남들의 이야기를 따라서 해보고 실망한 경험이 있어서였습니다. 


다이어트를 하다 말고, 영어 공부를 미루고, 카메라를 사고 나서 방치해놓은 자신을 보면서 실망할 것이 아니라, '살을 빼고 싶다, 영어를 잘 해야 한다, 사진을 잘 찍고 싶다'는 그 욕망들이 진짜 내 것이었는지를 반문하는 기회로 삼으면 되는 것 아닐까요. 

'다들 그렇게 한다'고 하니까, '요즘은 그래야 한다'고 하니까 그걸 그냥 내면화해버린 건 아니냐고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면 답을 찾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실망 앞에서 우리를 성장으로 이끄는 질문은 

"난 왜 이럴까?"가 아니라 

"난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입니다.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 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



글을 쓴 최혜진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하며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1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가 3년 동안 살며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명화가 내게 묻다><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썼고, 현재는 <볼드저널>의 콘텐츠디렉터로 일한다. 그림책이라는 놀라운 예술 장르에 매료된 자발적 마감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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