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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Sep 26. 2015

[그림책 처방] 혼혈로 태어났어요

다니카와 순타로 <나>, 키티 크라우더 <내 친구 짐>


to 에디터C


혼혈로 태어났어요

21세 여성입니다. 미국계 아빠와 한국계 엄마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났습니다. 쭉 한국에서만 살아서 아빠 고향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나도 한국인이야'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닌 사람으로 보이는  듯합니다. 저에게 "너희 나라로 꺼져 버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널 추방시킬 거야. 넌 왜 너희 나라로 안 가느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낍니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밝은 척을 합니다. 내 기분보다는 남의 기분을 더 생각하고 배려하면서 괜찮은 척 합니다.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잘못 태어난 걸까요? 사는 게 점점 힘이 들어요. 




자아라는 이름의 아메바 


메일을 받고 아주 한참 동안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막말을 했다는 그 머저리들에게 화가 나서 욕지거리를 퍼붓기도 했어요. 제가 어릴 때 받았던  어처구니없는 주입식 교육도 생각이 났습니다. 반만년 동안 혈연적 동질성을 가지고 단일민족을 이루고 산 것을 대단한 자랑인 양 자긍심을 가지라는 둥 어쩌고 했던 그 무식한 발상. 

국경의 개념이 흐려지고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아진 요즘엔 사라졌으리라 믿고 있었던 그 말도 안 되는 신화의 잔재가 이제 막 20대가 된 젊은 세대 안에 남아있는 게 얼마나 섬찟하던지요. 주입된 관념의 힘이 얼마나 세고 무서운지 생각했습니다. 


머저리들에 대한 욕으로 한 페이지를 너끈히 채울 수 있지만, 오늘은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독자분의 고민에만 집중을 해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빚어갑니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책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에서 자아를 아메바에 비유했습니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 아메바의 외벽은 탄력이 있어서 환경에 적응한다. 그렇다고 아메바에게 크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기 규정적인 형태가 없을 뿐이다. 부조리한 사람은 나에게서 나의 부조리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누가 나를 수줍어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결국 수줍어하게 될 것이다. 누가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계속 농담을 할 가능성이 높다. 



"다른 사람 시선은 신경 쓰지 않겠어"라고 결심해놓고 쉽게 실천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자꾸만 타인의 말에 흔들리는 자신을 왜 이렇게 쿨하지 못하냐고 자책할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 그건 그냥 인간의 본성이자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우린 모두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자신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아메바들이니까요. 



나를 설명하는 단어 주머니  


그렇다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타인이 나를 규정하는 말들에 신경을 아예 끌 수도 없고 쿨해질 수도 없다면 무엇이 현명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그 힌트를 일본의 시인 다니카와 순타로가 글을 쓴 그림책 《나 わたし》에서 발견했습니다. 


짧은 단발머리를 한 꼬마 여자애가 살며시 미소 짓고 있는 표지를 넘기면 왼쪽 페이지엔 "나"라는 단어 한마디와 소녀의 그림이, 오른쪽 페이지에는 "남자애들에겐 난 여자애."라는 글과 소년의 그림이 보입니다. 


책의 구성은 이후로도 동일합니다. 좌측 페이지에는 늘 하얀 배경에 똑같은 얼굴을 한 소녀가 서 있고, 오른쪽 페이지의 등장 인물은 바뀝니다. "우리 오빠가 볼 때 나는 작은 여동생" "우리 엄마가 볼 때 나는 딸 미치코" "우리 아빠가 볼 때도 나는 딸 미치코" "우리 할머니가 볼 때 나는 손녀딸" "켄이치 삼촌이 볼 때 나는 귀염둥이 조카  미치코"... 이렇게 소녀의 이름을 규정짓는 타인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그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 자신이 무엇이라 불리는지 설명합니다. 그 범위는 이제 가족을 넘어 타인으로 넓혀집니다.  그중 몇몇 페이지를 그림과 함께 소개합니다.  


사치코가 볼 때 나는 친구. 선생님이 볼 때 나는 제자. 


기린이 나를 볼 때는 작고, 개미가 볼 때 엄청 크지. 


외국인이 볼 때 나는 일본 사람. 외계인이 볼 때 나는 지구인. 


의사가 볼 때 나는 5세 여아 미치코 야마구치. 엑스레이에게 나는 이렇게 보이지. 


장난감 가게에 가면 고객님이 되고, 레스토랑에 가면 숙녀분이 돼. 


모르는 사람에게 나는 누굴까? 그저 많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일 뿐이야. 



이 책의 글을 쓴 다니카와 순타로는 《20억 광년의 고독》 《나날의 지도》 《철부지》 등의 책을 펴낸 일본 대표 시인입니다. 최근엔 한국의 신경림 시인과 대담집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를 발표하기도 했고, 아주  오래전부터 어린이 그림책에 글을 써온 분입니다. 


좋은 책이 그렇듯 이 책  《나 わたし》 역시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변함없이 꼿꼿하게 왼쪽 페이지에 서 있는 소녀를 보면서 '남들이 뭐라고 불러도 나는 나다'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도 있고, 가족에서 시작해 범위를 점점 넓혀 가는 구성 역시 의미심장하지요. 


제가 이 책을 처방으로 권하고 싶었던 이유는 우리는 이렇게나 많은 수식어로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어요.  그 누구도 호칭 몇 개, 단어 몇 개로 설명될 수 있을 만큼 쉽고 단순하지 않습니다. 혼혈아라는 말은 자신을 설명하는 수많은 단어 중 하나일 뿐이에요. 절대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또 어떤 머저리들 눈에는 혼혈이 탐탁지 않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수많은 인종이 피를 나누고 가정을 이뤄서 살고 있는 여기 유럽인들 눈에 혼혈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1980년대 초에 프랑스에서 ‘누가 진짜 프랑스인인가’를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통 프랑스인이란 부모와 조부모, 자녀까지 3대가 모두 프랑스인인 경우를 의미했죠. 결과는 이랬습니다. 혼혈이 없는 가정이 불과 20%도 되지 않는 것으로 나왔어요. 세상 어느 곳에선 혼혈아를 '당연한 이웃' '다양성의 축복'으로 보기도 합니다. 


더 쉽게 말해볼까요. 동서양의 이목구비가 섞여 있는 21세 여성이 만약 파리의 카페에 혼자 앉아 있으면 단언컨대 어디선가 은근한 관심을 표현하는 파리지엥이 나타날 거예요. (그걸 고마워하며 받아주라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이 땅 위 누군가에게는 동서양의 혼혈인이 다가가 말을 걸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존재로 여겨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넓은 세상이 있고, 더 다양한 시각이 있어요. 몇몇 머저리들이 내뱉은 단어 몇 개로 자신을 한계 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마구마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세요. 그렇게 '나를 설명하는 단어 주머니' 안에 있는 어휘의 개수를 늘리세요. 그 수가 많아질수록 한 개의 수식어에 부여하는 중요도와 의미는 1/n으로 줄어들 겁니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뭐, 이 세상 어떤 사람들에겐 내가 그렇게 보이기도 하겠지" 하고 툭툭 털어낼 수 있을 겁니다. 


* 한국어판 책 보기 > 

작가 다니카와 순타로

출판 한림출판사

발매 2011.12.20



벽을 허무는 열쇠 


다음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남들 기분에 맞춰주는 습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서로 만나게 하는 걸 막고 사람들 사이에 벽을 세우는 주입된 고정관념은 때때로 허물기가 참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수십 년간 공교육을 통해 주입된 '단일민족' 신화와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어 보이니 자신을 내려놓고 그들의 기분을 맞추면서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같아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벨기에 그림책 작가 키티 크라우더의 작품들 속에서 도움이 될만한 책 한 권을 발견해 그 이야길 해보려고 합니다. 《내 친구 짐》은 낯섦과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갈매기 사회에 홀로 떨어진 검정 도도새의 이야기입니다. 


검정 도도새 '잭'은 숲에 살지만 늘 바다가 궁금했습니다. 어느 날 숲을 통과해 해변으로 가 바다 구경을 하다가 하얀 갈매기 '짐'을 만나고 둘은 친구가 됩니다. 즐겁게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날아서 갈매기 마을에 놀러 갑니다. 온통 하얀색 갈매기만 사는 마을 입구에서부터 잭의 까만 깃털 색은 눈에 띕니다. 동네 산책을 하는 둘을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갈매기들. 잭이 묻죠. "왜 다들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짐이 대답합니다. "까만 새를 생전 처음 봐서 저래." 


짐은 마을 사람들 시선과 상관없이 새로 사귄 친구 까만 도도새 잭을 좋아했지만, 둘의 교제를 탐탁지 않게 보던 마을 사람들이 결국 직접적으로 뾰족한 말들을 쏟아붓습니다. "이 웃기게 생긴 새는 뭐냐?" 쏘아붙이며 잭을 비난하기 시작한 거죠. 자기 마을 사람들의 어리석은 태도에 화가 난 짐은 "이런 동네라면 다시는 안 오겠어"라고 응수하며 잭이 사는 소나무 숲으로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합니다. 


둘의 우정이 더 끈끈해진 어느 날, 도도새 잭이 보관하고 있던 책 더미를 발견한 짐이 이렇게 외칩니다. "아! 저 물건. 나도 알아. 우리는 장작불을 붙일 때 쓰거든." 

갈매기 마을에선 누구도 책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그들에게 책은 그저 땔감이었던 겁니다. 

책을 좋아하는 도도새 잭은 친구 짐을 위해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 책을 꺼내 읽어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길 엿들은 한 꼬마 갈매기 노베르가 집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갈매기 마을에 '그 검정 새가 밤마다 이야기라는 것을 들려준다던데? 그게 엄청 재미있대.' 조금씩 입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직접 그 현장을 목격한 갈매기들은 난생 처음 이야기 세계를 접하고 푹 빠집니다. 매일 밤 소나무 숲까지 날아와서 잭의 이야기를 듣죠. 잭의 집에 매일 밤 새로운 방문객이 문을 두드립니다. 잭의 이야기에 매료된 갈매기 숫자는 계속 늘어났고, 그들은 이제 같은 이야기 세상에서 같은 감정을 느끼고 같은 순간 폭소를 터뜨리며 함께 웃는 사이가 됩니다. 




잭과 짐처럼 세상을 살다 보면 신기하게도 인종, 나이, 자란 배경 등과 크게 상관없이 서로의 영혼을 알아보는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자주 오지 않는 축복이지만, 굳이 자주 와야 할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딱 한 명만 있어도 그로부터 편견에 맞설 힘과 용기도 얻고, 울림과 위로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의미 없는 머저리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주는 한 명의 소중한 친구와 더 시간을 보내세요.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단단한 듯 보였던 고정관념을 녹인 건 '이야기의 힘'이었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능력은 까만 도도새 잭에게만 있고 다른 하얀 갈매기들은 갖지 못했던 능력입니다. 다른 누구에게도 없는 나만의 독특성과 개성. 편견의 벽을 허무는 일의 시작을 거기에서부터 찾아보면 어떨까요. 두려움에 무작정 기분을 맞추어주면서 자기가 가진 귀한 것을  등한시하는 일은, 이제 그만하기로 해요. 


 * 덧, 키티 크라우더 《내 친구 짐》의 한국어 버전은 2002년 금성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가 현재는 절판된 상태입니다. 도서 정보는 여기에서




글을 쓴 최혜진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하며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1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가 3년 동안 살며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명화가 내게 묻다><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썼고, 현재는 <볼드저널>의 콘텐츠디렉터로 일한다. 그림책이라는 놀라운 예술 장르에 매료된 자발적 마감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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