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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Nov 01. 2015

[그림책 처방] 툭하면 얼굴이 빨개집니다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 


to 에디터C


24살 여대생입니다. 전 외모가 못났고 소심합니다. 남들 앞에서  이야기하거나 부끄러운 상황이 되면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집니다. 피부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인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지도 못하고요. 말주변도 없어요. 제가 말을 하면 분위기를 가라앉는 느낌입니다.  

외모가 예쁘고 활발하게 타인들과 어울리는 친구들 앞에서는 더욱 소심해져 버립니다. 몇 년 전에 SNS에서 알게 된 동갑내기 여자분이 있는데 이분이 제 이상향입니다. 그분은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옷도 잘 입고, 재미있고, 활발하고, 사람들에게 사랑도 많이 받아요. 웃을 때 정말 예쁘고 피부도 너무 좋아요. 이 분을 닮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부러워한지가 몇 년째입니다. 끊으려고 해도 계속  그분 SNS를 찾아보게 됩니다. 

저도 사람들 앞에서 얼굴이 빨개지지 않고, 당당하고, 말도 잘하고, 생기 넘치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옷도 잘 입고, 피부도 좋아지고, 글이든 그림이든 한 가지라도 잘하는 것을 갖고 싶습니다. 


from 4월 


to 4월


쉽지 않겠지만 '나는 이런 사람이고 싶다'는 내용을 죽 나열하지 말고 우선순위를 매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마지막 문장에 등장한 여러 항목들 - '사람들 앞에서 얼굴이 빨개지지 않고, 당당하고, 말도 잘하고, 생기 넘치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옷도 잘 입고, 피부도 좋아지고, 글이든 그림이든 한 가지라도 잘하는 것을 갖고 싶습니다. ' - 이 중에서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딱 한 가지가 있다면 뭘까요? 뭘 1번에 놓으시겠어요? 


from 에디터C 


to 에디터C


저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당당함'입니다. 어디를 가든, 누구 앞에서든, 누가 뭐라고 하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from 4월 




꾸밈을 강요하는 문화  


성형수술 세계 1위 국가인 한국에 살면서 자신의 외모에 만족감을 느끼는 여성이 되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외모 지상주의 주범인 매스미디어와 광고를 차치하고, 친구나 친지와의 대화에서조차 "요즘 살 좀 쪘네?" "야, 이제 너도 화장 좀 하고 다녀라" "넌 쌍꺼풀만 하면 딱 예쁠 텐데" "넌 살만 좀 빼면 진짜 완벽한데" 서로가 서로를 품평하고 통제하는 말들을 인사처럼  주고받으니까요. 4월 씨가 특별히 의지가 나약해서 외모 콤플렉스가 생긴 게 아니고, 외모 콤플렉스 없이 살기가 너무 힘든 나라라는 걸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꾸밈에 대한 강요와 간섭이 심한데다 무리에서 이탈하면 안된다는 공포심도 만연하다 보니 대다수 여성들은 사회가 기대하는 방식대로 행동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졸음과 싸워가며 화장과 머리를 하고, 다리와 겨드랑이 털을 밀고, 뽕브라도 하고, 음식물을 입에 넣을 때마다 칼로리를 계산하고, 성형외과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거울 앞에서 푸념합니다. 


이 풍경을 조금 떨어져서 생각해보세요. 어딘가 서글프지 않나요?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은 문제가 있다. 꾸며야만 그나마 매력적일 수 있다. 꾸며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광고 메시지를 내면화해서 그 틀에 자기를 맞추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풍경. 

옷을 잘 입고 싶고 피부가 좋아 보이게 화장을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무조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게 재미있고, 일상의 활력이 된다면 뭐가 문제겠어요. 다만 '나는 못 났기 때문에' '가려야 하기 때문에'라는 단서가 붙어있는 꾸밈이 문제라는 겁니다. 



당당함은 결심에서 


4월 씨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당당함이라고 했습니다. 메일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4월 씨가 당당함을 '여러 가지 항목이 모두 충족된 후에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점이었습니다. 어학 시험을 볼 때 듣기 말하기 쓰기 모든 과목에서 최소 몇 점 이상을 얻어야 시험 패스가 되는 것처럼요. 


안면홍조 때문에 당당할 수 없다고 체념한다면 얼굴 반쪽이 붉은 점으로 덮인 안면장애를 가진 채 <내 이름은 예쁜 여자입니다>라는 책을 발표한 김희아 강사의 당당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몸 전체를 뒤덮은 백반증 때문에 얼룩말이라고 놀림받다가 개성있는 모델로 성공한 위니 할로우의 당당함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당당함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결심이 아닐까요. 나를 사랑하겠다고, 내 몸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겠다고, 당당해지겠다고 마음먹는 것. 외모, 사교성, 인맥을 다 갖추고도 '나는 매력이 없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당당할 수 없을 겁니다. 


나의 가치는 나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나는 언제까지고 나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겠노라 작심할 수 있다.
- 웨인 다이어 <행복한 이기주의자> 중 



오늘 소개하려는 이탈리아 작가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의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는 이런 삶의 태도를 유쾌하게 풀어낸 우화입니다. 

원서 제목은 <5 malfatti>인데요. malfatti는 시금치를 짓이겨 만든 완자를 뜻한답니다. 불어판 번역본의 제목은 <les 5  malfoutus>이고, 불어로 'mal foutu'는 절망적인, 기진맥진한, 보기 흉한 등의 뜻으로 쓰여요. 대략 느낌이 오시죠? 

이게 이탈리아 malfatti입니다

한눈에 봐도 참 못생겼고, 뭔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그림책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한국어판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에서는 '어딘가 하나씩 부족한 친구들'이라는 말로 순화시켜 번역했습니다.   



어딘가 하나씩 모자란 친구 5명이 함께 모여삽니다. 첫 번째 친구는 배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두 번째 친구는 꼬깃꼬깃하게 접혀있는 몸을 가졌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몸이 물렁물렁해서 늘 피곤하고 축 늘어져 있었죠. 네 번째 친구는 위아래가 거꾸로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친구는 뭐라 설명하기도 힘든 수준입니다. 머리에 비해 팔다리가 너무 작아서 거대한 공처럼 보였습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입니다. 

이들은 별일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다지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집에 모여 '누가 가장 못난이인가'를 두고 입씨름을 했죠. 그래도 즐겁기만 했습니다. 


어느 날, 전에 본 적 없는 놀라운 존재가 이들을 찾아옵니다. 바로 '완벽한 친구'였습니다. 잘 생기고, 피부도 매끈한데다, 몸은 쭉 뻗어 날씬하고, 코도 오뚝하고, 심지어 머릿결까지 길고 탐스럽습니다. 누구처럼 몸에 구멍 따위는 뚫려있지 않은 완벽한 친구였죠. 


별일 없이 지내는 다섯 명의 모자란 친구들을 보면서 완벽한 친구는 뭐든 할 일을 찾으라고 재촉합니다. 쓸모없이 시간을 축내지 말고 무슨 일이든 할 생각을 하라고 소리를 높이죠. 다섯 친구는 제각각 답합니다. 


"나는 생각을 해도 모두 구멍으로 빠져나가."

"내 생각은 죄다 주름 사이에 꼭꼭 숨어 버려."

"난 생각을 하다 보면 금세 흐물흐물해지고 잠이 와."

"나는 무슨 생각을 해도 자꾸 생각이 뒤집어져."

"내 생각대로 하면 결국 엉망이 되고 마는걸."


완벽한 친구는 대놓고 힐난합니다. 저 한심하다는 표정 보이시나요. 결국 이 말을 내뱉습니다. 

"너희들은 정말 무가치 하구나"


이 발언 때문에 다섯 친구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답합니다. 


"그럴지도 몰라.
대신 나는 화를 잘 내지 않아. 화가 나려다가도 구멍으로 빠져나가거든." 
"나는 주름 사이사이에 추억을 많이 간직할 수 있어."
"나는 거꾸로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걸 볼 수 있어." 
"나는 맨날 엉망으로 망치기 때문에 어쩌다가 성공하면 대신 끝내주게 행복해." 

'몸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꼬깃꼬깃 접혔다, 위아래가 뒤집혔다'는 사실에서 좋은 점을 찾아내는 이 장면은 짜릿할 정도로 통쾌합니다. 누군가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관점을 바꿔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좋은 면을 찾는 노력이 자신의 가치를 만든다는 것을 깨달은 다섯 친구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마음으로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밖으로 나갑니다. 

집 안에는 완벽한 친구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집니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요.



글을 맺기 전, 몇 년째 SNS를 훔쳐보고 있다는 그 '완벽한 동갑내기' 이야기도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그녀를 이제 떠나보내세요. 그녀가 SNS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편집된 몇몇 순간일 뿐이라 실생활이 정말 부러워할 만한지 알 길이 없고, 설사 실제로도 완벽하고 멋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녀를 훔쳐보며 갖게 된 부러움이 스스로에게 실망감만 주고 점점 더 소심해지는 쪽으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데, 그 일을 계속할 이유가 있나요? 


완벽해지고 싶다는 기대가 우리 발을 묶어 버립니다. 4월 씨가 그토록 바라는 '당당함'에 가장 방해가 되고 있는 건 그 기대, 자신을 향해 들이민 그 높은 잣대가 아닐까요. 


완벽이 아니면 모두 소용없다는 격언을 한 단어로 줄이면 '무기력'이다.
- 윈스턴 처칠

* 그림책 정보 보기 : http://goo.gl/50LCUc



글을 쓴 최혜진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하며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1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가 3년 동안 살며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명화가 내게 묻다><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썼고, 현재는 <볼드저널>의 콘텐츠디렉터로 일한다. 그림책이라는 놀라운 예술 장르에 매료된 자발적 마감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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