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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Nov 20. 2015

[그림책 처방] 감당 안 되는 어리광

정유미 <나의 작은 인형 상자> 


to 에디터C 


평상시 저는 사람 사이에 선을 긋고 그 선을 잘 침범하지 않아서 차갑다는 인상을 주는 편입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 앞에서는 아이로 돌변한답니다. 무례하게 굴면 상대방이 싫어할 걸 알면서도 무조건 나를 좋아해달라는 요구가 마음 안에 가득 있어서 그 요구가 안 받아들여지면 서운하고 화가 나요.

며칠 전에는 남편이 싫어하는 게 보이는데도 자꾸만 뭔가를 조르다가 크게 싸우고 말았어요. 이런 저를 보면서 구제불능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이런 제 본모습을 싫어할까 봐 새로운 사람에게는 마음을 못 열겠고, 인간관계도 많이 좁은 편이에요. 스프링이 튀어나올까 봐 꾹꾹 눌러 가며 사는 게 이제 정말 힘듭니다. 자연스럽게 무리하지 않고 사람들과 편안하게 지낼 수는 없을까요? 


from 림 



동의를 늘 갈구하는 이유 


처음 메일을 받고 든 생각은 이것이었어요. '이건 완전 내 이야기인데?' 비슷한 고민을 가졌던 20대 초반, 제가 자주 들었던 문장이 기억 저 아래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너는 무슨 일이든 참 똑 부러지게 하는구나. 네 앞에서는 실수를 하면  안 될 것 같아." 


당시 제 대외적 이미지는 '차갑다, 다가가기 참 어렵다'였어요. 회사 선배 중 한분께 "너는 실수를 너무 안 해서 걱정이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기 통제를 잘하고 매사 정확했습니다. 그 인정 욕구 밑에 꾹꾹 눌러둔 두려움, 스트레스, 막막함을 유일하게 당시 남자친구에게만 표출했죠. 

그런데 그게 얼마나 아이 같은 방법으로만 표현이 되던지요. '오냐 잘했다 네가 맞다' 해주지 않으면 토라지고, 상대가 불편하든 말든 내 기분 맞춰주는 게 최우선이라 생각하고,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화를 내는 식으로 3년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응석을 부리면서도 "세상에서 유일하게 너에게만 이런 모습을 보인단 말야. 그만큼 네가 각별해서 그러는 거야"라며 상대방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제 유아적인 태도를 정당화하려고 했어요. 


돌이켜보면 저는 늘 그 친구의 동의를 받으려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제 생각과 감정에 확신이 없으니까 확인을 자꾸 받는 거죠. 정체가 모호한 감정들-불안, 질투, 괜스레 솟아오른 짜증-이 생기면 특히 예민하게 굴었는데, 그때 저는 그가 무조건 YES나 OK를 외쳐주길 기대했던 것 같아요.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왜 그렇게 했어. 다음엔 그러지 마'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냐' 같은 NO 사인이 오면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라도 되는 양 슬프고 서럽고 우울해졌어요. 작은 거절, 정당한 반응에도 마음이 데인 듯 펄쩍 뛰면서 무작정 떼를 쓰고 조르는 일을 저도 아주 많이 저질렀답니다. 


제 안에 해결되지 않은 거절감, 결핍감이 무의식 중에 남자친구를 '대체 엄마(보호자)'로 만들었고, 전 그 안에서 어리광으로 허기를 채우려 했던 것 같아요. 



내 마음을 맞춰봐  


떼 쓰는 아이를 마주하고 가장 괴로운 상황은 아이의 고집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고집인지 당최 파악이 안될 때입니다. 자기 기분을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아, 나도 몰라" "그냥" "아무거나" 이런 퉁명한 말을 툭툭 뱉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몰라준다고 서러워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요. 자기가 자기를 소외시켜놓고 '이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자기도 파악하지 못한 마음을 상대방에게 맞춰보라며 문제를 내주고, 상대방이 머뭇대거나 기분에 동조해주지 않으면 단박에 불쾌해하는 태도를 한 겹 벗겨내면 이런 본심에 도달하게 됩니다.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건 네 탓이다, 나는 내 감정을 책임지고 싶지 않다, 나는 희생양이다' 


굉장히 의존적인 생각이지요. 


메일에서 '이런 본모습을 싫어할까 봐' 두렵다고 하셨죠. 그래서 인간 관계도 좁다고요. 그 두려움 역시 자기 연민이 만들어낸 기만일 수 있어요. '나의 이런 모습까지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슬퍼하며  주저앉아 있는 건 본모습이 어떻든 나는 무조건 사랑받아야 한다는 기대, 어쨌거나 나는 원래 자리에서 꼼짝 않겠다는 고집이 그 안에 있다는 거거든요. 

 

본모습이 같이 있기 피곤한 떼쟁이라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 사람과 시간을 오래 보내면 영혼이 폭삭 늙는 기분이 드니까요. 부족한 자존감을 위로로 채워주느라 감정 노동도 하게 되고요. 

사람들이 어리광 많은 본모습을 싫어할까 봐 걱정이 되면 그 본모습을 내 힘으로 개선하겠다 결심하세요. 우린 그럴 수 있는 '어른'이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본인 밖에 없으니까요. 



마음, 덩어리로 보지 말고 쪼개서 보기 


오늘 권할 그림책은 한국인 최초로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 2년 연속 수상을 한 정유미 작가의 <나의 작은 인형 상자>입니다. 정유미 작가는 독특하게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인 자그레브 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대상을 받는 등 유력 영화제를 휩쓴 경력이 있죠. <나의 작은 인형 상자>와 전작 <먼지아이>는 모두 원작 애니메이션을 책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인데요. 연필 하나로 오랜 시간 정성을 다해서 그려낸 흑백 세밀화가 독특한 정서를 자아냅니다. 두 작품 모두 작가가 자신의 내면을 오랫동안 들여다 본 후 얻은 깨달음을 담고 있고요. 


이 세밀화 표현 방식은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정유미 작가의 섬세한 끈기를 잘 설명합니다. 진도가 참 더딘 연필이라는 도구를 선택해 같은 자리를 사각사각 수백번 덧칠하며 그림을 완성하는 방식은 매번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고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면서 조금씩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내면의 성장 방식과 어딘지 비슷해 보입니다. 



<나의 작은 인형 상자>는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에서 탄생했습니다.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친구들이 보여 달라고 몰려들자 상자를 닫아버린 기억을 떠올리며 만든 작품이라고 해요. 


책의 주인공 '유진'에게도 인형의 집이 있습니다. 거울 달린 화장대가 있는 침실, 냉장고가 있는 주방, 소파가 있는 거실이 딸린 집입니다. 유진은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친구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상자를 닫아 버립니다. 혼자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긴 유진의 내면에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폐쇄성을 벗고 새 세상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와 지금 이대로가 편하고 좋다는 반발. 


유진은 새로운 세상을 더 느끼기로 결심하고 옷을 챙겨 입습니다. 용기를 냅니다. 



보호막을 벗고 세상과 부딪히겠다고 결심했을 때, 언제나 우리를 가로막는 건 불안과 걱정,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변화를 결심한 것도 나 자신의 마음이고, 그걸 가로막는 것도 나 자신의 마음인지라  '도대체 내가 원하는 건 뭐지?' 혼란이 더 커지는 거죠.


정유미 작가는 주인공 유진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마주한 자기 내면의 불안을 세 명의 인물로 표현했습니다. 화장대 앞에서 거울을 보고 있는 여자, 집안일에 대한 책임감에 주방을 떠나지 못하는 여자, 신문을 읽으면서 '네가 바깥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몰라서 그래'라고 훈계하는 남자. 


세 인물을 만나서 유진은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습니다. "예쁘게 하고 나가야 사람들이 널 좋아하지" "지금 움직이면 모든 게 무너질지도 몰라" "바깥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이렇게 불안을 종요하던 인물들은 종국에는 모두 유진의 얼굴로 바뀝니다. 



그 불안들이 다른 어디에서 온 게 아니라 결국 내 안의 목소리라는 걸 인식한 후 유진은 신발을 고쳐 신고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갑니다. 처음에 등장한 세 명의 친구들 앞에서 인형 상자를 열어보이고 "안녕"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이 책의 미덕은 우리가 '두려움'이라고 퉁쳐서 말하는 감정 안에 얼마나 세세한 결이 있는지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감정을 덩어리째 받아들이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쪼개서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습니다. 마음의 결을 펼쳐서 자세히 보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하면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고 나면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냥 어리광을 피우면서 기대고 싶다는 마음 역시 세세하게 펼쳐놓고 보면 아주 다양한 목소리들이 혼합된 결과일 겁니다. 퉁치지 말고 펼치세요. 당신 마음의 그 결들을 읽어보세요. 


* 그림책 정보 보기 : http://goo.gl/9u7mvj 



글을 쓴 최혜진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하며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1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가 3년 동안 살며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명화가 내게 묻다><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썼고, 현재는 <볼드저널>의 콘텐츠디렉터로 일한다. 그림책이라는 놀라운 예술 장르에 매료된 자발적 마감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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