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터C 최혜진 May 14. 2016

[그림책 처방] 사는 게 귀찮습니다

볼프 에를브루흐 <커다란 질문>


to 에디터C


제 인생의 모토는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 되자'입니다. 다방면에서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헬스, 복싱 등 운동도 꾸준히 하고, 피아노, 드럼 등 악기 연주도 좋아합니다. 장학금을 타고 싶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운동, 봉사, 공부, 동아리, 연애 등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잘 챙겨가며 열심히 산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몇번씩은 전부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할 때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귀찮습니다. 죽게 된다면 이런저런 생각을 안해도 되니 편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평소에는 이것저것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왜 이렇게 자주 무너져버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실을 모두 잊고 싶을 때는 잠이 오지 않아도 억지로 잠을 잡니다.  

이유없이 계속 눈물이 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심리치료사에게 상담도 받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는 것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울한 마음이 앞으로 제 인생을 계속 방해할까봐 걱정이 됩니다.


 from 유니  



자기결정권을 빼앗겼던 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감 때문에 '사는 건 모두 귀찮고 죽으면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독자분의 이메일을 받고 제가 무슨 이야길 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전문 심리상담가가 아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 마음에 감응이 일어날 때까지 그 분의 입장과 감정을 오래 느껴보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이메일을 여러번 읽는 동안 기억 저편에 비밀스럽게 숨겨두었던 경험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끈질긴 우울감에 모든 것이 무겁게만 느껴졌던 때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열여덟 살, 제 몸 하나 가누는 것조차 무겁게 느껴졌던 때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고등학생으로 사는 게 이미 어마어마한 고통인데 저는 그 시기 지독한 첫사랑의 여파로 저 자신에 대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의심하고 난도질을 해야만 했거든요. '나는 누구일까?' 같은 건설적인 질문 대신 '나는 왜 이럴까?'라는 뾰족하고 아픈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댔습니다.


그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미래에 대한 부담감도 물론 절 짓눌렀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선 야간자율학습 시간이 되면 성적 상위 10%이 가방을 챙겨서 '생활관'이라고 불리던 별관으로 이동했습니다. 도서관처럼 개인 칸막이가 설치된 4인 1실의 쾌적한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는 특권을 줬습니다. 우등생들이 교실을 빠져나가고 나면 교실 밖 복도에 있는 철문을 선생님들이 잠갔습니다. 90% 아이들은 호시탐탐 땡땡이 칠 기회만 엿보는 문제아라는 듯 감금하고, 상위 10%의 학생에겐 특실을 제공하는 식의 발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졌던 시절이었죠. 매달 모의고사를 치를 때마다 철문 안에 갇히는 90%가 될까봐 무서웠습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시스템을 의심하고 반항하고 그것으로부터 뛰쳐나갈 용기가 없던 전 대신 저 스스로를 괴롭혔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의 의미, 세상이 허용하는 사랑의 범위, 공부하는 이유, 꿈의 의미 같은 커다란 문제부터 '그래서 잘 먹고 살려면 한 달에 얼마를 벌어야 하는 건가' 같은 구체적인 생활의 문제까지 누군가에게 질문하고 싶었지만, 뭘 어째야 할지 몰라 입을 굳게 닫고 모든 불안을 내면화했죠.


열여덟 살 때, 제가 유일하게 마음을 기댈 수 있었던 공간은 '생활관 옥상'이었습니다. 교실은 야만스러웠고, 집도 고민을 나누거나 따뜻한 대화를 하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장 내밀한 결핍을 심어준 공간이었기에 벗어나고 싶은 굴레에 가까웠죠. 야간자율학습 시간이 되면 선생님들의 감시를 피해 깜깜한 학교 옥상으로 올라가 음악을 듣거나 달을 보거나 일기를 쓰거나 울었습니다. 매일 매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친 듯 피어오르는 생각에 질식할 것 같았거든요. 지금 돌이켜보면 '아, 그때 난 우울증이었구나' 생각하지만, 그 당시엔 그 감정의 정체가 뭔지 몰랐습니다. 물론 이유도 몰랐고요.



옥상 난간 위, 기로에서


매일 밤 옥상을 허정허정 헤매고 다니니 친구들 눈에 제가 위태로워 보였을 겁니다. 이따금 옥상에 올라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친구가 두 명 있었는데요. 그 중 한 명이 어느 날, 옥상 난간 위로 훌쩍 올라가 성큼성큼 걷더니 난간 끝에 자릴잡고 앉더군요. "여기서 보면 저 멀리 헤드라이트 행렬이 고흐 그림처럼 보여. 와서 봐봐." 그 말을 듣고 옥상 난간 위로 발을 올렸던 그 순간을 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가림막이 전혀 없는 폭 30cm 정도의 난간에 서서 내려다 본 세상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한 발 옆으로 디디면 죽음이고, 반대로 한 발 디디면 삶이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게 뭔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 같은 당위가 아니라 체험으로서, 현실로서,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그 인식을 갖게 된 순간, 머릿속이 순식간에 정리되고 맑아졌어요. 난간 위를 걷는 동안 제 안에서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거든요.


'절대 여기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전 제 안에 그런 생의 의지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처음으로 들어본 주체적인 목소리였죠. '나는 죽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우울한 것도 삶의 포기하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니다. 잘 살아보고 싶어서, 그런데 지금은 방법을 잘 몰라서 몸부림치느라 그런 거다.' 이 인식이 피부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드는 것처럼 체험되었습니다. 이후 제 삶은 아주 서서히 나아졌습니다. 이유 모를 우울감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지만 저 자신을 제 삶의 주체로 받아들이고 나니 순간순간 작은 돌파구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의미를 사유하는 일


고민을 나눠준 독자분이 어쩌면 뜬금없다고 느끼실지도 모르겠어요. 그림책을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죽음 어쩌고 하는 이야길 꺼냈으니 말예요. 하지만 제가 마음을 담아 해드릴 수 있는 이야기가 정말 이것이었답니다. 죽음의 공포를 마주하고 서보면 '살고 싶어'지니까요. 심지어 여러 가치들의 우선순위도 순식간에 정리되기도 해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 원초적인 본능, 생존의 에너지가 자신 안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문제를 풀어나갈 수도 있습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죽을 각오로 하면 뭔들 못하랴, 이런 식의 이야길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전 저런 식의 문장을 듣고 단 한번도 생의 의지가 충전된 적이 없었거든요. 한번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 이제부터 소개하려고 하는 볼프 에를브루흐의 <커다란 질문>입니다.



그림책 철학자라 불러도 손색없는 볼프 에를브루흐는 이 책으로 2004년 볼로냐 아동도서전 라가치상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던지는 심오하고 철학적인 물음에 시처럼 정교한 문장으로 존재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게 당시 심사평이었죠. 아이들이 던지는 심오하고 철학적인 질문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책장을 펼쳐보면 각 장마다 인물 혹은 동물 혹은 사물이 하나씩 등장하고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글의 내용만 모아보면 이런 흐름입니다.


형은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고양이는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내기 위해서,

비행사는 하늘에 있는 구름과 입맞추기 위해서,

할머니는 나를 아껴주기 위해서,

새는 노래하기 위해서,

뚱뚱한 아저씨는 먹기 위해서,

숫자 3은 언젠가 3까지 셀 줄 알게 되기 위해서,

군인은 명령을 듣기 위해서,

뱃사람은 넓디 넓은 바다를 구경하기 위해서,

정원사는 참을성을 배우기 위해서,

돌멩이는 그저 그 곳에 머물기 위해서

...


질문이 책에 등장하진 않지만 책장을 넘기다보면 이미 질문을 들은 듯한 느낌입니다. 아이가 던진 커다란 질문은 바로 "당신은 왜 태어났어요?"였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죠.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들어봄으로써 저 질문의 답은 하나로 정해진 게 아니란 것, 수천 수만가지의 답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유시민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쓴 것처럼 '우리는 각자 정체성이 다른 자아들이다. 누구도 타인에게 삶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대신 결정해줄 수 없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나름의 답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라는 것을 서서히 느끼게 됩니다.


이윽고 책의 중반부에 도착하면 제가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전율을 느낀 장면이 등장합니다.



죽음, 네가 거기 있는 이유는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야.


내가 왜 존재하는지, 삶이 왜 가치 있는지 알고자 할 때 죽음에게 질문하라. 이 책의 메시지를 전 쉽게 넘겨 듣기가 어렵습니다. 내일 죽는다면 무엇이 후회될까,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오늘 뭘 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종종 질문을 하거든요. 가끔 남편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며 사냐고 의아해합니다. 울적하게 웬 죽는 생각이냐는 거죠.


이 글을 읽는 분 중 누군가 이렇게 되물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하고 힘든데 꼭 죽음에게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하냐고요.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 법을 깨우쳤습니다. 제가 진심을 담아 해드릴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제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황량했던 시기에, 다가올 앞날의 모든 것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던 옥상 위에서, 어렵게 깨우친 이 삶의 자세 뿐입니다.




글을 쓴 최혜진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하며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1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가 3년 동안 살며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명화가 내게 묻다><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썼고, 현재는 <볼드저널>의 콘텐츠디렉터로 일한다. 그림책이라는 놀라운 예술 장르에 매료된 자발적 마감노동자.

블로그 www.radioheadian.com

페이스북 www.facebook.com/writerchoihyejin

인스타그램 www.instagram.com/writer.choihyejin

매거진의 이전글 [그림책 처방] 감당 안 되는 어리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