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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May 25. 2016

[그림책 처방] 매사에 무기력합니다

올리버 제퍼스 <마음이 아플까봐>


to 에디터C


28세 여성입니다. 대학교 때부터 짝사랑을 해오던 선배와 잠깐 사귀다 차이고 3년째 새로운 연애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만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저를 '여자사람친구'로만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 여성스러움이 부족한 외모고, 어딜 가나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남들에게 잘 맞춥니다. 그래서 절 편하게만 대하고 이성으로 여기지 않는데, 저도 굳이 이 패턴을 깨고 싶단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취업입니다. 작은 잡지사에서 1년짜리 계약직 업무를 하고 있는데, 이 분야에서 제가 살아 남을 거란 확신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뭔가 새롭게 알아보고 궁리하는데 에너지를 쓰고 싶지도 않습니다. 연애, 직업 모든 면에서 의욕상실과 무기력을 느낍니다. 어떻게 하면 열정적으로 삶을 꾸려갈 수 있을까요?


from 로랑



우리가 마음을 닫는 이유는 『마음이 아플까봐』


마음을 한껏 웅크려 필사적으로 타인과 닿지 않으려 하고 있네요. 저 남자가 날 좋아하면 좋겠다는 기대감을 품었다가 상처받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제풀에 먼저 '서로를 이성으로 보지 않는 관계' 구도 속에 넣어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지금 같은 마음 상태로는 어떤 일을 해도 확신같은 것은 갖지 못할 거예요. 그 무엇에도 진심이나 최선을 다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포해버린 거나 다름없는 상태니까요.


잠깐 만났다가 차였다는 그 연애에서 받은 상처가 무척 깊었던 것 같아요. 3년 전 일을 이제와서 의욕상실과 무기력의 이유로 지목하는 게 새삼스럽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어요. 흔히 상처는 시간이 다 해결해준다고 하지만 그건 본인이 상처를 추스리기 위해 노력한다는 전제하에 성립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을 놓고 있으면 꼬꼬마 유년기 시절 상처도 언제든 현재를 좌지우지하는 진행형의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참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올리버 제퍼스(Oliver Jeffers)가 지은 그림책 『마음이 아플까봐』는 상실감과 실패감, 마음의 상처가 삶을 대하는 자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섬세하고 내밀하게 그려낸 책입니다. 의욕을 되찾는데 아마 도움이 될 거예요.


한 소녀가 있습니다. 여느 아이들처럼 세상 모든 일에 대해 궁금해하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늘어놓는 소녀입니다.

바다에 퐁당 잠수해 들어가서 고래에게 "안녕"이라고 인사할 순 없는 건지, 왜 고래와 우리는 다른 폐를 가진 건지, 바다 끝에는 배가 추락하는 낭떠러지가 있는 건지 재잘재잘 질문을 늘어놓습니다. 이 넘치는 호기심을 너그럽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는 할아버지가 소녀 곁을 지켜줍니다.  


할아버지에게도 소녀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별자리 보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하면 소녀는 "몸에서 빛이 나는 슈퍼 벌꿀들이 날아다녀서 밤하늘이 반짝이는 거야"라고 응수합니다. 할아버지와 소녀는 늘 함께였습니다. 소녀가 가장 좋아하는 건 바다였습니다. 해변을 걷다 보면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것들을 잔뜩 만날 수 있었거든요. 소녀는 바다를 볼 때마다 감탄합니다.


'왜 그럴까' '누구일까' 질문하길 멈추지 않던 소녀의 호기심은 어느 날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할아버지의 부재와 함께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빈자리를 보며 소녀는 상실감을 느낍니다. 그 절절한 슬픔이 너무 싫어서 소녀는 자신의 빨갛고 동그란 마음을 빼서 유리병 안에 넣고 봉해버립니다. 슬픔이 두려운 나머지 아예 슬픔을 느끼지 못하게 마음을 밀폐시킨 겁니다. 병에 마음을 넣어버리니 소녀의 아팠던 가슴이 무덤덤하게 바뀝니다.


마음을 유리병에 넣은 소녀는 더 이상 밤하늘을 바라보며 꿈꾸지 않습니다. 바다를 봐도 아무 흥미가 없습니다. 의욕이 없고 무기력합니다. 소녀의 호기심도 함께 병 안에 갇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마음을 가둬버린 유리병을 목에 걸고 성장합니다. 성인이 되고 보니 유리병의 존재가 거추장스럽고 짐스럽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리병 안에 있는 한 마음이 다칠 일은 없으니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럭저럭 일상을 살아갑니다. 한 자리에 앉아 꿈쩍도 안 하면서 "세상 사는 게 원래 다 이렇지" "어쩌겠어" 포기와 권태의 말을 쏟아내는 어른들처럼요.


무기력해진 그녀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상처 받을 가능성, 좌절할 가능성, 슬픈 일이 생길 가능성, 실연의 위험을 차단하면서 살 수는 있습니다. 움츠리고 봉해놓고 살면 됩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로 결정한 뒤 우리에게 돌아오는 건 굳어버린 머리와 말라버린 감수성입니다.


어느 날, 주인공은 해변에서 놀고 있는 꼬마 소녀를 만납니다. 소녀가 묻습니다. "파도가 치는 건 바닷속에서 코끼리가 발장구를 쳐서 그런 거지요?"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신이 나서 함께 상상을 펼쳤을텐데,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이 일로 주인공은 마음을 다시 꺼내보기로 결심하지만 망치로 두드리고 톱으로 쓸고 높은 곳에서 힘껏 내리쳐봐도 유리병은 깨지지 않습니다.


절대 깨지지 않던 유리병이 테이블에서 튕겨 나가 데굴데굴 굴러 해변에서 놀고 있던 꼬마 소녀에게로 갑니다. 꼬마 소녀는 병을 집어들더니 손가락을 넣어 갇혀 있던 마음을 쏙 꺼냅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쉽게 해버리죠. 다시 마음을 되찾은 주인공이 예전처럼 많은 일에 호기심을 갖고 별과 바다에 열정을 지닌 사람으로 돌아가면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전 이 그림책을 볼 때마다 그 안에 담긴 통찰에 놀랍니다.


먼저 사람으로 인한 상처를 해결해주는 건 새로 다가온 사람이라는 진실입니다. 혼자 온갖 도구를 사용해 난리를 피우며 깨보려 했지만 깨지지 않던 유리병이 타인과의 만남으로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니 더 만나세요. 친구도 좋고, 교회 지인도 좋고, 저처럼 얼굴 모르는 사람도 좋습니다. 고민을 더 나누세요. 은둔형 외톨이처럼 자학하며 방 안에만 있는 건 절대 금물입니다.


이 책에 담긴 또 다른 중요한 통찰은 바로 길을 잃은 듯 느껴질 땐 동심에게 길을 물으라는 겁니다.

앞서 그러셨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도, 새로운 일에 대한 방향성이나 의욕도 모두 없다고요. 이럴 때 때 큰 힌트를 주는 게 어린 시절의 자신입니다. 등수나 연봉 등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사회의 논리를 습득하기 이전의 자신이 어땠는지 생각해보는 겁니다. '성과'나 '인정'에 대한 부담감을 모르던 시절의 내가 품었던 순수한 열정과 호기심이 어느 방향을 가르키고 있었는지 기억해내는 거죠.


아이들은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참 잘 압니다. 시키지 않아도 반복해서 그 일을 하죠.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는 온갖 종류 공룡의 학명을 줄줄 외우기도 하고, 공룡이 나오는 책은 무조건 소장하고 싶어합니다. 전 어릴 때 매일 만화대여점에 가서 천정까지 가득 찬 서가 앞에서 책을 한 권 한 권 뽑아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엄마가 뜯어 말려도 그랬죠. 성인이 된 제가 지금 하는 일도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상태까지 마음이 무뎌지게 된 것은 신경쓰고 눈치볼 게 많은 어른이라 그렇습니다.

자신의 순수한 기쁨을 인생의 최우선순위로 여길 줄 알았던 그 시절의 당신에게 질문해보세요.

난 어떤 사람이었냐고.

아마 그 소녀는 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 그림책 정보 보기 : http://goo.gl/oFRfca 



글을 쓴 최혜진

잡지사 제이콘텐트리m&b에서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했다.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1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가 3년 동안 그곳에 살며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을 썼고, 현재는 자발적 마감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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