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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May 27. 2016

[그림책 처방] 감정을 드러내도 될까요

윤지회 <방긋 아기씨>


to 에디터C


어릴 때부터 여대생이 된 지금까지 부모님께 늘 같은 이유로 혼이 납니다. ‘말을 이쁘게 하라’는 지적입니다. 기분이 얼굴에 곧장 드러나는 성격이거든요. 초등학생 때 엄마 친구가 집에 놀러오면 저는 ‘내가 혼나는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손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늘 제가 손님 앞에서 기분 조절을 못했다고 혼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타인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게 더 좋았습니다.

기분에 따라 갑자기 말수가 줄거나, 좋을 땐 주체할 수 없이 좋아하는 제 태도를 고치려고 부모님은 20년간 노력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면을 고치지 못했고 불쑥불쑥 이상한 행동이 튀어 나와서 엄마와 갈등이 커져갑니다. 얼마 전, 엄마가 보낸 카톡이 너무 딱딱하게 느껴져서 엄마에게 “나한테 명령조로 말하지 마”라고 했더니 10일만에 이런 답장을 보내셨어요.


<네 안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네 스스로 만든 거다. 난 그걸 해결하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한 어미다. 착한 마음 예쁜 말. 내가 20년 내내 너에게 강조한 건 이거 하나다. 이것을 못하면 너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누구도 널 사랑하지 않을 거다.

지금까지는 내 자식이 엉뚱한 길로 가면 안된다는 의무감 때문에 너를 끌고 왔다. 때리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다. 내 자식을 남 앞에서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너도 이제 남 부럽지 않은 대학생이 되었다. 너도 알 것이다. 네가 뭐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이건 내 작품이라고 자만한다. 이제 됐다. 여기서 멈춘다고 해도 적어도 명문대 대졸 이력서는 가질테니까. 더 이상 힘들게 끌고 가지 않겠다. 네 인생이다.>


이 문자를 받고 가족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처럼 외로웠어요.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울고만 있습니다. 저는 밝고 긍정적인 모습만큼 슬픔, 화 같은 감정도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감정을 솔직히 드러낼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합니다. 그 반응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저를 찌르는 기분이에요.


from 잭



네 안에서 보이는 내 모습


보내주신 메일을 여러 번 읽으면서 독자분이 스스로에 대해 한 가지 전제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감정적이고 성급하다. 기분 조절을 못해서 늘 우왕좌왕 한다. 그래서 내가 입을 열면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먼저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될까요. 제 입장에서는 우왕좌왕하는 메일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연을 읽는 동안 힘들지도 않았고요. 세상 모든 사람이 솔직한 내 이야기를 버거워한다는 전제도 어떻게 보면 스스로에 대한 고정관념일 수 있어요. 적어도 저는 문제가 될 정도로 감정 조절을 못하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보내신 문자를 읽어보니 순식간에 미아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저는 전문적인 심리상담가가 아니고, ‘나라면 어떨까’ 감정이입을 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제가 하는 말을 한 사람의 의견 정도로 가볍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머니는 독자분을 ‘내 작품’이라고 지칭하셨지만, 저는 이 의견에 반대합니다. 미성년인 어린이도 하나의 독립된 인격입니다. 하물며 스무살이 된 성인이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주무른다고 그대로 만들어질까요. 작품이라는 표현 안에 숨어있는 '내가 너를 빚었다'라는 전제가 저는 좀 무섭기까지 합니다.


우리 마음에 어떤 감정이 피어올랐다면, 그게 타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그 여부와 상관없이, 그 감정은 우리에게 진실입니다. 행동에는 옳고 그름이 있을지 몰라도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내 마음에 일단 그것이 자리잡았다면 그건 내 것입니다.


물론 그 감정을 타인 앞에서 표현해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책임지는 법 역시 배워야합니다. 그러나 책임지는 법을 배우려면 먼저 자기 감정에 솔직해져야 하고,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주변사람이 싫어하니까 그 감정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무작정 없애려고 노력한다면 자기 마음의 일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방치하게 되는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머니가 강조하신 '착한 마음, 예쁜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웃기 싫어도 웃어야 할 때가 있고, 혼자서 감정을 꿀꺽 삼켜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이해가 됩니다. 저는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덧붙이고 싶어요.


대단히 착하지 않아도
대단히 예쁘게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진실한 사람은 그 나름의 매력으로
누군가와 깊은 교감을 할 수 있습니다.


"착한 마음 예쁜 말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고, 누구도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다"라는 어머니 말씀은 너무 단정적입니다. 부디 그 안에 갇히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 나름의 방법으로 행복도 찾아나갈 수 있고, 사랑도 배워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어보고 싶은 그림책은 윤지회 작가가 지은 <방긋 아기씨>라는 작품입니다. 처음 읽었을 때 굉장한 울림을 느껴서 제가 아껴두고 편애하며 읽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왕비님 모습에서 시작합니다. 크고 화려한 궁궐에 살지만 마음 둘 곳이 없어서 늘 혼자인 것처럼 느끼는 왕비입니다. 그녀에게 큰 선물이 찾아옵니다. 바로 예쁜 아기씨가 태어난 거죠. 왕비님은 아기씨를 위해 뭐든지 해주고 싶었습니다. 하루 종일 아기씨만 쳐다보면서 곁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왕비는 깨닫습니다. 아기씨가 태어나고부터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다는 걸요. 왕비는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아기씨를 웃게 만들기 위해서 특별한 선물을 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일류 재단사를 불러와 솜사탕처럼 보드라운 천에 비단실로 꽃수를 놓아 아기 옷을 지었습니다. 값비싼 옷에도 아기씨는 웃지 않습니다.

일류 요리사를 데려와 왕비님이 지금껏 먹어 본 것중에 가장 맛있었던 음식만 골라서 한 상을 차려냅니다. 하지만 아기씨는 웃지 않고 왕비만 말똥말똥 쳐다봅니다.

이름난 광대가 동원됩니다. 우스꽝스러운 공연을 펼쳐도 아기씨는 왕비만 쳐다봅니다.


‘아기씨가 통 웃질 않는다더라’는 소문이 궁궐 밖으로 흘러나갑니다. 엉엉 울던 사람도 깔깔 웃게 만드는 신통한 비법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의사 카르가의 귀에까지 소문이 들어가게 되죠.


왕비는 카르가에게 아기씨의 치료를 맡기게 되고, 카르가는 깃털을 아기씨 코에 대고 문지릅니다. 주문을 외우는 순간, 아기씨가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왕비가 어르고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화가 났습니다. “저 돌팔이를 당장 감옥에 가두어라!” 명령하는데, 카르가가 다급해진 나머지 마법 깃털을 왕비 코에 대고 문지릅니다.



마법에 걸려 웃음보가 터져버린 왕비는 눈물이 줄줄 흐를 때까지 웃고 또 웃습니다. 이 모습을 아기씨가 말똥말똥 쳐다봅니다.

아기씨 눈에 환하게 웃는 왕비 얼굴이 한가득 담깁니다.

아기씨는 방긋 웃습니다.

아기씨의 두 눈동자 안에 한가득, 엄마의 웃는 얼굴이 담겨있습니다. 엄마가 웃자 아이도 웃습니다.



이 책은 그림책 좋아하는 엄마들 사이에서 '눈물 빼는 책'으로 유명합니다. 아이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서 잔뜩 날카로워진 신경으로 이것저것 좋다는 것을 찾아 헤매느라 정작 중요한 것은 뒤로 미뤄뒀다는 깨달음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웃게 하는 건 값비싼 옷, 이름난 요리사의 음식, 일류 놀잇감이 아니라 엄마의 행복이라는 점을 아프게 일깨우는 책이죠.


왕비는 '웃지 않는다'는 것을 아기씨의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아기씨가 자신의 표정을 보면서 따라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웃지 않는 건 결국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런 오류를 저지릅니다. 내 안에 있으나 내가 대면하기 싫은 어떤 모습을 타인에게 투사해 '저건 저 사람의 문제'라고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어른 대 어른으로 엄마와 만나기


이 책을 권하기 위해 여러 번 다시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독자분의 어머니에 대해서요. 어머니가 "착한 마음 예쁜 말"을 입버릇처럼 강조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요. 어머니가 지금껏 억지로 삼켰을 감정과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마 어머니도 외딴 성에서 마음 둘 곳 없다고 느꼈던, 늘 혼자인 것만 같았던 이 왕비와 비슷한 마음이었겠구나 싶었습니다.


독자분은 이제 스무살이라고 했습니다. 많이 젊지만 분명 성인입니다. 성인이 된다는 건 부모를 한 명의 인격체로서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엄마에게도 '나의 엄마이기 이전의 시절'이 있었음을 알고, 그 시절의 엄마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녀가 지닌 마음의 상처를 들여다볼 줄 알게 되는 게 어른이 되는 일이라고 믿고 있어요.  


쉽지 않겠지만, 어머니에게 한번 이야기 해달라고 말해보세요. 어린 시절에 어떤 아이였는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어떤 엄마 아빠였는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가장 속이 상했을 때가 언제였는지, 내가 태어나기 전 엄마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고 말예요. 엄마는 아이에게 공기처럼 당연한 존재라 이런 별도의 질문이 낯간지러울 수 있지만, 엄마 역할 외의 다른 스토리와 다면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엄마도 나처럼 상처 받고 불안에 흔들리는 불완전한 영혼이라는 점을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겁니다. 왜 어머니가 "착한 마음 예쁜 말"을 그토록 강조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하게 된다면 속에 꽉 차있던 힘든 마음이 압력솥에서 김이 빠져나가듯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방긋 아기씨>를 볼 때 꼭 눈여겨 보길 권하는 부분이 있어서 이야길 덧붙입니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속표지에 적힌 작가 소개글 아래 윤지회 작가가 남긴 한 줄의 헌정사입니다.


엄마가 웃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딸이 엄마에게 드립니다.

우리가 아이일 땐, 엄마가 우리를 향해 웃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엄마를 웃게 하기 위해 먼저 이해의 손을 내밀거나 먼저 웃어보일 수 있는 어른이 이제는 되었습니다. 어른 대 어른으로 엄마를 다시 만나보세요.


* 그림책 정보 : http://goo.gl/auDJss 



글을 쓴 최혜진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하며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1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가 3년 동안 살며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명화가 내게 묻다><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썼고, 현재는 <볼드저널>의 콘텐츠디렉터로 일한다. 그림책이라는 놀라운 예술 장르에 매료된 자발적 마감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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