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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Jun 03. 2016

[그림책 처방] 과거가 발목 잡을 때

이자벨 카리에 <아나톨의 작은 냄비>


to 에디터C


대학교 졸업반 학생입니다. 제가 다니는 학과에서는 대학원에 많이 진학해요. 저 역시 대학원 진학 준비라는 핑계로 취업 준비를 유예한 상태입니다. 준비할 게 산더미인데, 솔직히 취업도 못할 것 같고 대학원 진학도 실패할 것만 같아서 아버지 일을 돕는데 시간을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고민은 제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전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우울증을 오래 앓으셨던 어머니가 자살을 하셨어요. 중학교 때는 왕따를 당했고요. 같이 노는 무리에서 돌림 왕따가 유행했어요. 저도 왕따를 시켜본 경험이 있고 돌림 순서가 되어 저도 당한 것 뿐인데, 고작 일주일의 왕따 기간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결국 다시 그 무리와 어울리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멀어지는 길을 스스로 택했습니다. 그 이후 제 삶이 어긋난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느꼈어요.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나서도 친하다고 할만한 애들이 없었어요. 체육시간, 학교 행사, 소풍 등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 활동이 많은 날은 제게 하루가 일년 같았죠. 친한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절 함부로 대하고 아랫사람 취급을 해서 절교를 했고, 3학년이 되어서야 좀 어울리게 된 무리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결국 혼자란 느낌이 더 많이 들었어요. 대학교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친한 선배도 없고 친한 친구도 없는 것 같아요.


전 어떤 면에서 굉장히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두 번의 연애도 제가 먼저 고백해서 이뤄졌고,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에겐 잘 다가가기도 해요. 제가 겪은 과거가 물론 사소한 건 아니지만 그것을 비밀로 붙이는 편도 아니고, 친한 친구나 상담가에게 몇 번 상담도 받았을 정도로 풀어 놓았어요. 근데 제 안에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드네요. "나는 실패자야. 난 결국 안될 거야. 전에도 그랬듯 난 안돼." 저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현실은 고여있다는 느낌이 자꾸만 듭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저를 과거가 붙잡는 것 같아요.


from 0123



기억을 언어로 불러내기


먼저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이번 메일을 받고 '전문 상담가가 아닌 내가 한마디를 거들기에는 큰 상처가 아닐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어요.

그 순간 저에게 힘을 준 것은 글 속에서 분명하게 흐르고 있는 독자분의 힘 있는 목소리와 극복의지였습니다. 당사자가 개선을 갈망하는데, 제가 지레 선 긋기를 해버린다면 '역시 내 과거는 웬만해서는 감당하기 힘들구나' 하며 더 큰 외로움을 느끼실테니까요.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림책 처방>에 도착하는 다른 사연들과 똑같이 여러 번 신중하게 읽고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교감해보기로 결심했어요.


독자분과 똑같은 '사건'을 겪어보진 않았지만 과거에 발목이 잡힌 것 같다는 그 '감정'은 제게도 익숙하거든요. 감당하기 힘든 과거의 기억 때문에 마음을 앓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을 찾는 게 아마 더 어려울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우리의 교감을 방해하는 것은 두려움 말고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할 수 있는 한 힘껏 제 생각을 이야기해볼게요. 독자분이 저에게 그렇게 글을 보내준 것처럼요.


편지를 읽으면서 떠오른 책과 글귀가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라는 철학자가 쓴 <자기 결정>에 나오는 이 문구를 먼저 나누고 싶어요.


기억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잊고 싶다고 해서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기억하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자기 결정적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결정적 존재가 되려면 일단 이해하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독자분의 편지에서 가장 진하게 느껴지는 정서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돌림 왕따의 가해자 겸 피해자였던 경험 이후 삶이 빗나갔다고 표현하셨고, 그 이후 친한 친구가 없다는 설명을 반복하셨어요.

페터 비에리는 기억이 우리를 어둠 속에서 꼼짝 못하게 옭아맬 때, 그들을 언어로 풀어내야만 그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해볼게요. '순서가 정해진 돌림 왕따였고, 나도 가해자였던 적이 있고, 고작 일주일만 당했는데도 충격이 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다음에 "왜일까?"라는 질문을 붙이는 순간부터 기억을 언어로 불러내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그토록 충격이 컸던 것은 '나는 너를 소외해도 너는 나에게 그러지 않을 것이다' 기대했던 마음이 배반당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면 왜 그런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던 걸까요? 내 편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나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지 않아서였을지 몰라요. 큰 상실의 경험 이후에 오는 당연한 마음의 반응이었을 거예요.


반면 궁금한 점이 있었어요. 독자분은 편지에서 "친한 친구가 없다"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거듭 말하다가 마지막엔 어머니와 관련된 상처를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을 정도로 열어두었다고 언급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같이 하고, 어떤 순간을 함께 해야 "우리는 친한 친구야"라고 말할 수 있다고 믿으시나요?
'친한 친구'라고 상정하고 있는 그 관계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외로움은 아무 때나 불쑥 찾아오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무언가 원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순간에 강렬하게 체감되거든요. 내가 타인에게 무엇을 구하는지 스스로에게 정확히 설명할 수 없을 때, 외로움은 이해하기 힘든 모호한 형태로 마음을 덮치죠.


제가 편지를 거듭 읽으면서 느낀 것은 독자분이 '무리의 일원으로 소속감을 느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소수이더라도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며 함께 밥 먹고 수다 떨 수 있는 관계를 친구 사이라고 여기는 건지 마음 깊은 곳 상처까지 내보일 수 있는 관계를 친구 사이라고 여기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었어요.

스스로 자신이 바라는 게 뭔지 잘 이해되지 않아서 막연하게 "나는 친구가 없어"라고 말하며 원인을 과거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 이유죠.


대학원 진학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어떤 꿈이 있는지, 바라는 것이 뭔지 아직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또래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래요!) 그 탐구 과정에서 느껴지는 막막함을 잊으려고 "난 안 될 거야"라고 예단해버린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독자분은 친구의 부당한 행동에 절교를 선언할만큼, 좋아하는 남자와 관심가는 친구에게 먼저 고백하고 다가가는 용기를 낼만큼 스스로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지극히 건강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장하고 대견하다고 느껴질만큼 강한 영혼, 그리고 마음 안에 사랑이 많은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관계가 내 마음처럼 안 풀려갈 때의 속상함, 내 꿈이 뭔지 파악이 되지 않을 때의 막막함은 사실 많은 20대가 보편적으로 호소하는 고민입니다. '앞으로 나가고 싶은데 제자리걸음 하는 느낌' 역시 성장 욕구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끼는 보편적 감정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독자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과거의 사건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자기 이해의 과정에서 당연하게 동반되는 막막함,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과거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스스로에게 필요한 질문을 던지면서 자기 감정을 세분화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에너지가 상당히 많이 드는 일이니까요. 그게 엄두가 나지 않고 힘이 들어서 '내 방황의 원인은 특이한 과거 경험 때문일지도 몰라'라고 판결을 내리고 있진 않나요?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꼭 한번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냄비 하나


서두가 정말 길었습니다. 제가 고민을 오래 했더니 전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졌네요. 그럼 이제 '과거가 발목 잡는 것처럼 느껴질 때' 읽으면 좋을 그림책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이자벨 카리에가 지은 <아나톨의 작은 냄비>입니다.



주인공 아나톨은 빨간 냄비를 달그락달그락 끌고 다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냄비가 아나톨의 머리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떨어졌는지, 왜 하필 아나톨이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어느 날 냄비가 주어졌습니다. 성별, 국적, 가족, 가족사, 신체 정서적 특성 등 우리의 선택과 상관없이 운명처럼 주어진 여러 삶의 조건들처럼 아나톨에게 냄비가 찾아왔습니다.


아나톨은 인사성도 밝고, 사랑받는 것을 좋아해서 남들에게 "안아줘요!"라는 말도 잘 하며, 아픈 사람을 챙기는 상냥한 면도 있습니다. 음악과 그림을 사랑하고요. 잘 하는 게 참 많은 아이인데도 사람들은 아나톨이 끌고 다니는 냄비만 쳐다봅니다. 냄비가 이상하다면서요. 냄비 때문에 아나톨은 자신은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죠.


냄비 때문에 아나톨은 힘들었습니다. 걸을 때마다 거추장스러웠고, 나뭇가지나 움푹 패인 홈에 걸려서 아나톨이 앞으로 가는 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아나톨은 냄비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멀리 던져보기도 하고 줄을 끊어보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냄비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아나톨은 작은 냄비 때문에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믿어버립니다. 속이 상한 나머지 숨어 버리기로 하죠. 그러면 더 편해질 것 같았거든요.



오랫동안 냄비 안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씩 아나톨을 잊었고, 아무도 아나톨에게 말을 걸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원피스 주머니 안에 작은 녹색 냄비를 넣고 있는 한 사람이 아나톨에게 말을 겁니다. 세상에 평범하지 않은 사람은 아나톨 말고도 많거든요. 그 사람이 원피스 주머니 안에 있던 자신의 녹색 냄비를 꺼내보이는 순간, 아나톨은 냄비를 다시 벗어던지고 싶단 생각을 합니다.



그 사람은 아나톨에게 냄비를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둘은 각자의 냄비를 꺼내들고 탁구를 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아나톨이 무서워하는 것이 뭔지 표현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은 냄비는 아나톨의 삶의 여러 조건 중 하나일 뿐 전부가 아니며 다른 재능이 아주 많은 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사람은 아나톨에게 냄비를 넣을 수 있는 가방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냄비를 없애버릴 수는 없지만 아나톨의 걸음을 방해하지 않도록 가방 안에 넣어놓을 수 있었던 거죠.


가방 안에서 냄비는 여전히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지만 예전처럼 눈에 잘 띄지 않았고, 어디에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아나톨은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고, 사람들은 이제야 아나톨의 그림 솜씨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면서 칭찬합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이 책의 마지막 문구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아나톨은 예전과 똑같은 아나톨이랍니다.


냄비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아나톨은 똑같이 아나톨입니다. 이 말을 한번 더 생각해보면 냄비 역시 아나톨의 일부라는 뜻이 됩니다.


냄비는 우리 각자가 가진 '감당하기 어려운 운명, 삶의 조건, 의사와 상관없이 처해진 환경' 등을 상징합니다. 크기나 색깔은 조금씩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냄비를 하나씩 가지고 있죠. 어떤 냄비는 쉽게 감당할 수 있지만 어떤 것은 한 걸음 내딛기조차 힘든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그 냄비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은 정말이지 쉽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든, 어쨌든, 이것이 내 인생'이라는 받아들임의 과정에서 필요한 것, 때론 구원이 되는 것이 바로 내가 짊어진 냄비의 무게를 알아주는 타인의 공감입니다. 나에게도 냄비가 있어,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이는 사람들이요.

 

"제 주변에는 그렇게 다가와주는 사람이 없어요. 제 과거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평범하지 않은 사람은 아나톨 말고도 많다는 사실을요. 체육 시간, 학교 행사, 소풍날에 하루가 일년처럼 느껴졌던 사람이 당신 혼자가 아니라는 걸요. 무리지어 활동하는 것을 못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인간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많다는 점도요.

 

마지막으로 누구에게나 감당하기 쉽지 않은 냄비가 있다는 것, 그 냄비를 자신의 일부로 끌어안으려고 고군분투 하면서 달그락달그락 걸어나가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라는 점을,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 그림책 정보 : http://goo.gl/mYr9k0 



글을 쓴 최혜진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하며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1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가 3년 동안 살며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명화가 내게 묻다><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썼고, 현재는 <볼드저널>의 콘텐츠디렉터로 일한다. 그림책이라는 놀라운 예술 장르에 매료된 자발적 마감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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