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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Jun 16. 2016

[그림책 처방] 꿈이 없어요

사뮈엘 뤼베롱 <복잡하지 않아요>


to 에디터C 


취업 준비생 1년 6개월 차입니다. 대학 동기들은 이미 3년 차 직장인입니다. 저를 힘들게 하는 것은 '취준생'이라는 신분보다 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직장인 친구들과 여행을 했습니다. 다시 한번 느꼈죠.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친구들은 저마다 꿈을 가지고 이미 첫 발을 내디뎠지만 저에게는 '출발점'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느낌입니다.


요즘 "짜증 난다"는 말과 거친 언어들을 자주 사용합니다. 조금만 못마땅한 게 있으면 바로 표정이 바뀌고 짜증을 냅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친구들에게 "넌 몸속에 짜증이 가득해"라는 말을 들었죠. 겉으로 표현 안 하고 속으로 화를 삼키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표정으로 드러나서 친구들은 오히려 말을 하라고 합니다. 어차피 다 보인다면서요.


작년까지만 해도 새로운 도전도 많이 하고 사람들과 만남도 자주 갖고 잘 웃었습니다. 요즘은 정반대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고 새로운 상황이나 환경에 거부감이 먼저 듭니다. '내가 뭘 한다고 무슨 좋은 결과가 나오겠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점점 나쁘게 변해간다는 느낌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제가 참 바보 같아요.


from 인들



꿈이 사치가 된 시대


얼마 전, 단짝 친구와 '일과 자아실현'을 주제로 깊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저는 하루에 4시간만 일하고 생계가 유지되는 환경이라면 하기 싫은 일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할 수 있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일하면서 보내야 하는 환경이기 때문에 단순히 '돈 벌기 위해서'라는 하나의 이유로 일을 고르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이 삶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큰 시대에 살고 있으니, 가급적 자기 본성에 맞는 일을 해야 삶의 행복도가 높아지지 않겠냐고 설명했고요. 친구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처럼 본성에 맞는 일을 찾은 사람은 정말 운이 좋은 거 아닐까. 자기 일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이 문제는 직종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 같아. 공장에서 단순 노동을 하거나 남들이 꺼려하는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돈벌이' 말고 다른 일의 의미를 찾기가 힘들 거야."


제가 각박한 현실을 잘 몰라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야, 먹고사는 것만으로 이미 어려운 세상이야. 그냥 먹고사는 데 의의를 두고 참고 살아야지"라고 말하는 건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면 모든 게 장땡'이라고 말하는 현 시스템에 자신도 모르게 일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 노동자가 무조건 돈 때문에 일한다는 생각에도 찬성하기가 힘들었어요. 반복적인 행위와 그로 인해 예측할 수 있는 일상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꿈'이라는 말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꿈이 뭐예요?" 이런 질문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요. 한 사람이 생의 전반에 걸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을 차곡차곡 유무형의 가치로 바꿔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를 너무 단순하게 퉁쳐서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저런 질문은 누군가 저에게 한다면 '내 마음속에 있는 그 구구절절한 것들을 어떻게 정리해서 말하나' 싶어서 어버버하고 말 것 같아요.

또 '꿈'이라는 말이 홈쇼핑의 "매진 임박"과 마찬가지로 불안을 조장해서 무언가를 파는 데 사용되는 것도 자주 목격할 수 있고요. 꿈이 있으면 다 할 수 있다고, 꿈부터 꿔보라고 하는 말들이 또다시 선동이나 강압이 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 독자분이 보내주신 사연처럼 "꿈이 없어서 고민"이라고 말하는 걸 들을 때마다 마음이 조금 심란해집니다. 사고를 당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먹고사는 것 자체가 이미 곡예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워진 미친 자본주의(격한 단어라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정말 미친 것 같아서요.) 시대에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을 들먹이면서 꿈까지 찾으라고 말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꿈이 상징하는 '일의 의미, 목적, 세상을 마주하는 자세와 태도' 등에 대한 질문과 생각을 놓아버리는 건 더욱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꿈'이라는 단어를 조금 바꿔보려고 합니다. '내 본성이 가치 있다고 의미부여할 수 있는 행위' 정도로 풀어보면 어떨까 싶어요. 이렇게 표현을 바꿔보면 생각을 예민하게 다듬기 좋습니다. 그 행위가 뭔지 찾으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거든요. 자신의 본성을 모르면 어떤 행위에 의미부여를 하는지도 모를 테고, 어떤 일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도 알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은 자기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본성에 다가가기 위한 스스로 훈련법


오늘 독자분이 보내주신 사연은 취업준비생뿐 아니라 하나의 목표점을 두고 달려야 하는 경쟁 상황 안에 놓인 대부분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해요.


옆 경쟁자들이 어디쯤 뛰어가는지 훤히 보이고 자기 자신은 기대했던 결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을 한 번 보고 나면 그 자체로 굉장한 상처가 될 수 있거든요.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죠. 하물며 지원서를 내고 탈락하는 상황을 거듭 겪어야 하는 취업준비 기간이라면 아무리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라도 자존감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평가에 대한 두려움, 옆 선수에 대한 질투나 시기 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마구 올라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 감정들을 처리하는 방법을 몰라서 자꾸 짜증으로 퉁쳐지는 걸 거예요. 자기 마음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어린이들이 “아, 몰라” “아무거나” 이렇게 툴툴 내뱉는 것처럼요.


꿈이 없는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모르겠다’는 건 자기 느낌을 포착하는 레이더망이 무뎌졌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즐거운지, 재미를 느끼는지, 집중이 잘 되는지, 싫은지, 도망가고 싶은지 등 자신 안에서 피어나는 느낌을 일단 포착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 나는 이 일이 하고 싶었구나’ 혹은 ‘하기 싫었구나’ 알 수 있거든요.

물론 직접 해보기 전에는 그 일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면 정반대의 느낌이 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오해를 꽤 많이 가지고 살아가니까요.


자기 느낌을 포착하는 건 훈련을 통해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기를 반복하는 거예요. 사소한 일이더라도 일상 속에서 취업과 관련된 행동(시험 준비, 학원 수업 등)을 할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거죠.

“지금 기분이 어때? 하고 싶어? 집중이 잘 돼?”

자기 마음이 어떤 대답을 내놓으면 그 뒤에 “그럼 왜 그럴까?”를 덧붙여보는 거예요.

“왜 집중이 안 되는데?” “왜 기분이 좋았지?” “신경을 거슬리게 한 사람이 누구지? 그 사람의 무슨 행동이 내 신경을 자극했지?” 이런 식으로요.


사실 이 '셀프 질문 대답법'은 제가 아는 유일한 해결책이랍니다. 저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하기와 대답하기를 반복하면서 일기를 썼고요. 아주 오랫동안요. 그 일기 덕분에 제가 가졌던 스스로에 대한 오해, 진짜 제 취향과 제 본성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발견했고 자기 이해의 폭을 넓혀갈 수 있었어요.

오늘 소개할 그림책 <복잡하지 않아요>는 이 자기 이해의 과정을 단순하면서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감탄하며 종종 펼쳐보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소년에게는 루이즈라는 이웃집 친구가 있습니다. 소년과 소녀는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지만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습니다. 크레용을 가지고 땅바닥에 나무들을 그리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냅니다.


어느 날, 루이즈가 소년에게 묻습니다. "네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어?" 소년은 멋진 질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죠.


집에 돌아온 소년은 거울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정말 내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잡하지는 않아요. 잘 열면 보이니까요.

소년은 자기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 보기 위해 머리를 열어보기로 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건 숲이었어요. 이 장면 이후부터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바로 다양한 숲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들입니다. 고요한 숲, 비밀스러운 숲, 수줍어하는 숲, 어두운 숲, 따뜻한 숲, 신비로운 숲... 그 숲들 가운데 루이즈와 함께 동네 길바닥에 크레용으로 그렸던 나무들도 섞여 있습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잘 그려진 그림이 주는 감탄과 쾌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림 안에 녹아있는 '다면성을 긍정하는 시선' 때문입니다.

본성이라고 하면 똑 떨어지게 한 마디로 말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안에는 어두움, 밝음, 수줍음, 활발함, 냉소, 따뜻함 같은 모순적인 면모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100%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고, 100% 선하기만 한 사람도 없어요. 100% 활기찬 사람도 없고, 100% 무기력한 사람도 없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깊은 숲처럼 나라는 사람의 내면도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원시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죠. 그 안으로 들어가 굽이굽이 살펴보고 싶다는 열망도 심어주고요.  


소년은 자신이 발견한 모든 숲들에 대해 루이즈에게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희망은 좌절되었어요. 루이즈가 이사를 가버렸거든요. 크레용을 가지고 혼자 동네 길로 나옵니다. 하필이면 비까지 내려서 루이즈와 함께 그려두었던 크레용 숲도 모두 지워지고 맙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는 않습니다. 소년은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내게는 마음이 없는 걸까?"


소년은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합니다.  


복잡하지는 않아요. 잘 열기만 하면 보이니까요.


소년이 마음을 열어서 발견한 게 무엇인지는 비밀로 남겨둘게요. 중요한 건 머리와 마음을 열어보며 자기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메시지니까요. 책에 반복해 등장하는 문장처럼 "복잡하지는 않아요. 잘 열기만 하면 보이니까요."


저 역시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 대부분이 자기 이해의 폭이 좁다는 사실을요. 한국의 정규 교육 과정을 평범하게 이수한 보통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취업준비 기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바꿔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대학 졸업 후 갖는 이 시간이 우리가 처음으로 정규 교육 과정에서 빠져나와 홀로 맞게 되는 순간입니다. 처음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서는 순간이죠. 그것도 아주 절실하고 격렬하게 말이죠.

그러므로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 시간을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험해보는 시간’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래라저래라 남들이 짜 준 수업 시간표대로 평생을 살다가 처음으로 자기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나는 지금 어느 회사든 들어가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어’


대신


‘나는 지금 자기 탐험 중이야. 막막하고 서툰 게 너무 당연해. 나에게 시간을 주면 결국 나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게 될 거야.’


라고 생각을 바꿔보는 거예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당락에 대한 의미부여도 달라질 겁니다.

취업 준비 기간을 그저 ‘입사’를 위해 보내야 하는 기계적인 나날들로 바라본다면 어느 회사에 지원했다가 탈락하는 게 쓰디쓴 패배처럼 느껴지겠지만, 자기 탐험의 일환으로 본다면 탈락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게 많기 때문에 (물론 심리적 타격이야 받겠지만) 새로운 환경 앞에서 폐쇄적으로 스스로를 닫고 가시 돋친 말을 쏟아낼 만큼 심각한 좌절에 빠지진 않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제가 인터뷰로 만났던 그림책 작가 이치카와 사토미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씀을 덧붙이며, 응원의 마음을 가득 얹어 보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야 행복 쪽으로 방향성을 틀 용기도 생깁니다.
힌트를 드릴까요?
무슨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 나머지를 잊어버릴 수 있다면 그게 당신이 진짜 좋아하는 일이고, 당신의 열정이 불타오를 수 있는 일이란 신호입니다.
흔히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하죠? 그 살아 있다는 느낌이 신호예요."


* 그림책 정보 : http://goo.gl/ElsIBD 



글을 쓴 최혜진

잡지사 제이콘텐트리m&b에서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했다.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1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가 3년 동안 그곳에 살며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을 썼고, 현재는 자발적 마감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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