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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Oct 29. 2015

[그림책 처방] 옛 연인에게 늘 미련이 남아요

샤를로트 문드리크, 올리비에 탈레크 <무릎딱지>

* 이번 그림책 처방은 조금 특별한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사연을 보내주신 독자분의 이메일이 이미 한편의 훌륭한 처방전이었기에 저와 독자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옮깁니다. 생각을 나눠주신 독자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to 에디터C


저에겐 안 좋은 버릇이 있어요. 지나 보면 항상 아쉽고 미련이 남아요. 그 아쉬움 때문에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고 지난 일들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다가 오히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홀해지고 상처를 줘요.

20대 초반 풋풋한 첫사랑을 거쳐 그저 그런 남자도 만나봤고 착하거나 못된 남자도 여럿 만나봤어요.

못된 남자는 날 아프게 하고, 착한 남자는 내가 아프게 했죠. 그런데 지나 보면 어찌 되었든 항상 미련이 남아요. 미련은 집착을 낳고, 헤어지고 난 뒤 항상 저는 옛 연인에게 의문의 문자를 남겨요. 지금 남자친구가 있어도 지나간 사람에 대한 마음의 정리가 안돼서 항상 옛사람을 찾게 돼요. 그러다 보면 지금 내 옆에 있는 상처를 주고 떠나보내고, 다시 미안함과 미련이 남구요.

과거에는 정중히 안녕하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길 방법이 없을까요?


P.S.

<무릎딱지>라는 그림책을 읽은 적 있는데 큰 위안이 되더라고요. 지나간 상처에 연고를 발라줄, 새 살이 돋게 도와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무릎딱지>라는 책을 소개하면 저처럼 과거에 발목 잡혀  힘들어하는 분들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from 선물




to 선물


보내주신 메일 잘 읽어보았어요. 공감이 많이 가는 사연이기도 했고(저도 이별 후 전연인을 잊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었거든요), 궁금한 점들도 있었고요.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옛 남자친구들에게 미련이 남는 이유가 뭘까요? 그가 좋은 남자였는지 나쁜 남자였는지와 관계없이 말예요.

헤어짐 자체가 싫어서일까요? 아니면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건 보호막 없이 온몸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니, 책임질 일 없는 추억을 매만지면서 슬퍼하는 상태에 있는 게 더 편안해서일까요?  

괜찮으시다면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용기 내어 메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뵐 수 있길 바랄게요.


from 에디터C




to 에디터C


답장 감사합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도 옛 남자친구에 대해 미련을 갖는 이유를 물어보셨죠?


제 경우에는 지나간 연인과의 시간 동안 제 마음에 충실하지 못했어요. 싸우고 비난하고 헐뜯더라도 더욱더 최선을 다해 싸웠어야 했고, 사랑하는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다 소진해 버렸어야 했는데 말예요. 또 이별을 하고 마음에 생채기가 나면 직접 그 상처를 치료하지는 않고 계속 그 위에 붕대만 감아댔던 것 같아요. 안에서는 피고름이 새는데 새로운 관계 다른 관계라면 괜찮을 거야,라는 식으로요.

그렇게 이별을 항상 미완의 상태로 남겨놓으니 미련이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어요. 미뤄놓거나 미완성된 일은 더 잘 기억하고 더 신경 쓰며 더 집중하게 된다는 자이가르닉 효과처럼요.


저는 많은 헤어짐들 속에서 진심을 다해 헤어진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진짜 헤어짐"은 슬프니까, "일단 헤어짐" 이후에 붕대를 갈듯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 상처 위에 덧대어 보았지만 저는 사실 마음 한편에 늘 알고 있어요. "일단 헤어졌던" 지난 연인과의 "진짜 헤어짐"이 필요하단 사실을요. 근데 그게 용기가 안 나니까 차라리 상처를 더 후벼 파고 덧내서라도 "진짜 헤어짐"을 유예시키는 거예요.


지금의 이런 제 상태가 그림책 <무릎딱지>에 나오는 엄마 잃은 상처를 무릎딱지에 비유하면서 무릎에 딱지가 생기지 못하게 스스로 뜯어내는 어린 꼬마의 모습과  오버랩되더라고요.


모든 상처는 받아들이고 충분히 아파야 하고, 그만큼 충분하게 치료가 돼야 하는데 말이에요. 제가 아닌 다른 많은 독자들도 스스로 아파야 할 땐 아플 줄 알고, 꼭 충분한 치료가 되어 더 이상 임시방편의 붕대에 기대는 게 아니라 진짜 새 살이 돋게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 몇 글자 적어요.


from 선물




애도와 우울


<무릎딱지>의 주인공 ‘나’의 상처는 엄마의 상실에 기인합니다. 책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엄마가 오늘 아침에 죽었다. 사실은 어젯밤이다. 아빠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난 밤새 자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달라진 건 없다. 나한테 엄마는 오늘 아침에 죽은 거다.


함부로 위로조차 건네기 힘든 거대한 상실을 맞닥뜨린 작은 아이의 내면을 은유하듯 그림책 속 아이의 집이 온통 빨갛게 그려져 있습니다. 상처의 색, 고통의 물감 빨강.



 <무릎딱지> 속 ‘나’는 슬픔에 빠져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아빠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죠. 아빠는 젖은 수건처럼 눈물을 뚝뚝 쏟고 있고, 엄마가 하듯 아침 빵을 맛있게 만들 줄도 모릅니다. 혼자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 아이는 모든 것을 닫아 버립니다. 엄마 냄새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집 안의 창문들을 꼭꼭 닫고, 자신 안에 남아있는 엄마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귀를 막고, 입을 다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마음 안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걸 알게 되고, 마당에서 넘어져 무릎에 생긴 딱지를 손톱 끝으로 긁어서 뜯어내기 시작합니다. 아픈 건 싫지만 그렇게 하면 엄마 목소리가 또 들려오니까 다시 상처를 내서 피가 나오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엄마를 기억하려 합니다.


이 대목은 읽어 넘기기가 참 힘들어요. 읽을 때마다 목울대 근처가 먹먹해지거든요. 자신에게 상처를 내서라도 예전의 관계, 상실이 생기기 이전의 상태에 머물고 싶어하는 아이의 간절함이 묵직한 통증으로 다가옵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프로이트의 논문 「애도와 우울」을 인용해 이렇게 썼습니다.


“애도와 우울은 사랑해오던 대상을 상실했을 때 주체가 보이는 반응이라는 점에서는 일단 같다.
그러나 애도가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그 대상에 쏟았던 에너지를 철회하여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라면(그래서 ‘애도 작업’이나 ‘애도 기간’ 같은 말이 성립될 수 있다), 우울은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그 대상과 동일시하면서 자기 파괴적인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경우다.”



<무릎딱지>는 ‘나’가 우울의 단계에서 애도의 단계로 건너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딱지가 앉기 기다렸다 떼어내는 방식으로 ‘엄마를 잊는 것에 대한 공포’를 견디던 아이는 이야기 후반부 할머니의 방문을 계기로 애도의 방법을 배웁니다.

가슴 위에 손을 올려주며 “여기, 쏙 들어간 데 있지? 엄마는 바로 여기에 있어. 엄마는 절대로 여길 떠나지 않아.”라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아이는 온 힘을 다해 달립니다. 심장이 쿵쿵 뛰어서 숨 쉬는 게 아플 때까지. 그렇게 하면 엄마가 가슴 속에서 아주 세게 북을 치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으니까요.



엄마를 심장에 묻은 아이는 천천히 애도를 마치고 성장의 단계로 향해 갑니다. 무릎엔 새 살이 돋습니다. 딱지가 사라진 것을 깨달은 아이는 울고 싶었지만 울지 않기로 합니다.


애착은 삶을 풍요롭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향신료입니다. 마음을 다해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이 없다면 삶은 분명 단조롭고 퍽퍽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실했을 때 최악의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이 애착의 대상입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마찬가지죠. 애착의 대상은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애착의 경험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아끼고 좋아하게 되는 건 어쩔 도리가 없는, 영혼의 순리니까요. 그 순리 때문에 모든 사람은 상실의 상처를 경험하죠. 이미 치유된 것일 수도 있고 막 곪아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거의 잊혀 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모든 이는 어떠한 의미에서 상처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 기어코 삶을 이어가도록 요구받습니다.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저는 상처가 사람을 성장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상처를 통해 겪게 되는 고통의 깊이만큼 성장의 여지도 늘어난다고요.

의식의 성장은, 특히 자신에 대한 의식의 성장은 자기 자신을 파헤쳐 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평소에 자기 자신을 파헤쳐 볼 마음을 먹지 못합니다. 상처는 자기 자신을 파헤쳐 봐야 할 내면의 필요성으로 둔갑해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를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 돌아봄의 고통 속에서 의식을 성장시킵니다.

<무릎딱지>의 아이가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건 잊는 것, 또 잊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상실은 쉽게 잊을 수 있지만, 어떤 상실은 결코 잊히지 않습니다. 후자의 상실은 상처일 테지만, 상처를 통해서만 우리는 마침내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 그림책 정보 보기 : http://goo.gl/asM4Gp



글을 쓴 최혜진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하며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1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가 3년 동안 살며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명화가 내게 묻다><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썼고, 현재는 <볼드저널>의 콘텐츠디렉터로 일한다. 그림책이라는 놀라운 예술 장르에 매료된 자발적 마감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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