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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Oct 13. 2015

[그림책 처방] 타인의 동정심에 자꾸 기댑니다

안느 에르보 <콩알만 한 걱정이 생겼어요> 


to 에디터C 


타인의 동정심에 자꾸 기댑니다


안녕하세요, 에디터님. 저는 .......입니다. 제가 저의 소개를 ......으로 해 둔 이유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마음이 많이 아파 위로받고 싶어서 이 메일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저를 드러내기가 두렵습니다.

어릴 적부터 저는 비밀을 쉽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비밀 말고 제 비밀요. 힘들고 어두웠던 제 이야기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싫어했습니다. 저는 몇 년 동안 그녀의 삶을 곁에서 보고 그녀가 해준 충고를 몇 번씩 들은 후에야 이 습관을 그만 뒀습니다. 아니 그만 두려고 노력 중이라고 해야겠죠. 

저는 제 입이 너무 싫습니다. 하지만 제 유일한 특기는 영어입니다. 그러니 제가 싫다고 하는 입은 영어를 말하는 입이 아니라 계속 쓸데없는 말을 하는 이 주둥이일 겁니다. 위로받고 싶다는 마음이 강한 것 때문에 계속 남들에게 저의 비밀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워봤습니다. 맞는 것 같더라고요. 위로받고 싶은 마음, 보호받고 싶은 마음. 이걸 내려놓을 수는 없을까요? 고통스럽습니다. 



쉼 없이 우는 작은 사람 


안녕하세요. .......님. 오늘은 이런저런 이야기보다 그림책을 먼저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벨기에 작가 안느 에르보가 2003년 발표한 <La Princess au petit poids>를 함께 읽어보려고 합니다. 


제목을  직역하자면 '작은 무게의 공주'인데요. poids라는 단어는 무게, 무거움, 하중, 무거운 짐, 근심 등의 뜻으로 폭넓게 사용됩니다. 그리고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어로 pois, 즉 '완두콩'이 있죠. 


사실 <공주와 완두콩 La Princess au petit pois>라는 제목의 동화는 안데르센의 아주 유명한 고전입니다. 안느 에르보는 이 제목을 약간 변형해 '가녀린 공주의 작은 근심'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주제를 찾아냈고, 섬세한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몸을 웅크리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이 작은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책에서는 물론 '공주'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성별과 나이와 상관없이 공감대를 가질 수 있도록 '작은 사람'이라는 말로 바꾸어 읽어보려고 해요.  


 

작은 사람은 무척 불행했습니다. 작은 근심이 있었거든요. 콩알 같은 근심이 그녀의 왕관 속에 있는 건지 혹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동그르르 굴러다니는 건지 몰랐습니다. 근심이 굴러서 멀리 사라져 버리라고 작은 사람은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돕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오가며 비틀거리던 작은 사람은 결국 길을 잃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이면서 울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야." 




작은 사람의 가족과 지인들은 그녀의 눈물을 멈추기 위해 많은 선물을 주었습니다. 마술사, 요리사, 기사, 하인, 정원사, 떠돌이 이야기꾼 아저씨, 모자장수까지 동원됩니다. 하지만 많은 선물을 받아도 작은 사람은 슬펐습니다. 



"사람들은 머나먼 나라에서 춤추는 여자들을 데려와 그림자 연극을 하게 했습니다. 
그녀에게 모래성도 지어주고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들도 바쳤어요.
세상에서 가장 솜씨 좋은 디자이너들을 왕궁으로 불러와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꿈을 짓고 구겨진 꿈들은 팽팽하게 펴게 했어요.

요정들은 빗자루로 청소를 했어요.
재미있게 생긴 아저씨는 웃겼어요.
고양이는 야옹거리며 아양을 떨었어요.
코주부 아저씨는 코 이야기만 늘어놓았어요.
그리고 추기경 할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떤 노력에도 작은 사람의 슬픔은 잦아들지 않았고 눈물 역시 멈추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그녀의 눈물이 홍수가 되어 세상이 조금씩 잠겨갑니다. 호수, 들판, 논과 밭이 모두 잠겨버립니다. 

세상을 눈물로 다 채워버리고 나서도 작은 사람은 계속 울고 싶었지만  몸속에 있는 수분이 눈물로 다 빠져나가 목이 너무나 말랐죠. 

그때 멀리에서 농사를 짓던 아이가 작은 사람을 찾아옵니다. 먼 곳에서 배를 타고 노를 저어 오랫동안 걸어왔습니다. 그 아이는 반짝이는 무언가를 소중하게 두 손에 감싸 조심스럽게 작은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한 잔의 물. 목이 마른 작은 사람에게 지금 꼭 필요한 것. 작은 사람은 반짝이는 물컵을 받아 쥐고 살며시 웃으며 물을 마십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나는 이래'라는 오해에 걸려 비틀거리다 


보내주신 고민 메일을 굉장히 여러 번 읽었습니다. 처음 읽을 땐 몰랐는데 여러 번 계속 반복해 읽다 보니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생기더군요. '어릴 때부터 비밀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곧잘 해왔다고 했는데, 그럼 그걸 비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밀은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말아야 할 일'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건 힘들고 어두웠던 시절이라고 해서 꼭 비밀에 붙여져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이 가진 여러 가지 경험담의 일부이고 그걸 남들에게 들려줬다고 여기면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쉽게 자기를 드러내고 경험담을 나누는 스스로의 모습에 "나는 위로가 그리워 비밀을 파는 사람"이라고 쾅쾅쾅, 판결을 내려버린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메일 속 '그녀'라는 분의 영향인 것 같다고 그저 추측해 볼 뿐입니다. 


<콩알만 한 걱정이 생겼어요>에서 작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기 전에 한 행동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머릿속에 있던 콩알 같은 근심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가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야"라고 결론 내려버리는 장면 말예요. 이 부분에서 작가 안느 에르보는 이런 문장을 씁니다. 


Elle trébulochocrapoutait sur ses idées. 

그녀는 자기의 생각에 걸려 넘어졌다. 


중간에 있는 저 긴 단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말이고, trébuchement(비틀거림, 넘어짐), locher(흔들어 떨어뜨리다), crapahuter(험난한 행군)이라는 단어를 조합해 작가가 발명해 낸 말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걸려 이리저리 비틀거리고 흔들리면서 헤매는 모습을 그려보게 만드는 표현이죠. 


우리는 많은 오해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오해는 꼭 타인과 세상을 향한 것만은 아닙니다. 작은 걱정과 근심에서 시작해 생각을 펼치다가 돌연 자기 스스로를 향해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쉽게 결론을 내려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틀을 가지고 자신을 관찰하다가 조금만 비슷한 상황이 펼쳐져도 '또! 또! 이러는 거 봐. 내가 이렇다니까' 하며 원래 가지고 있던 오해를 강화하는 길로 빠지기도 합니다. 



꼭 필요한 적절한 위로 


<콩알만 한 걱정이 생겼어요>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눈물을 멈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작은 사람을 울고 싶은데, 모두가 눈물을 그치라며 아우성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위로가 아니었죠. 이야기 마지막에 등장한 농사 짓는 아이만 그녀의 마음을 읽어줍니다. 그만 울라는 말 대신 그녀의 갈증에 공감하고 물 한 잔을 건넵니다. 작은 사람이 처음으로 웃는 장면이기도 하죠. 


'위로받고 싶은 마음, 보호받고 싶은 마음. 이걸 내려놓을 수는 없을까요? 고통스럽습니다.'


메일 마지막에 남기신 이 문장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비밀 이야기를 털어놨다고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자기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정작 본인에게 꼭 필요하고 적절한 위로를 받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얄팍한 동정심에 기대어  사랑받고자 하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로받고 싶은 마음 자체를 없애버려야 할 불결한 무언가로 여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넌 이미 너무 많이 울었으니(너무 많이 떠들었으니) 

이제 그만 좀 해.' 


이런 날카로운 생각으로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지 마세요. 당신에게 꼭 필요하고 적절한 물 한 잔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이제는 그 목마름의 정체를 파악해야 할 때입니다. 마구잡이식 위로나 동정 말고, 나에게 진짜 필요했던 '물 한 잔'은 무엇이었을까  질문해보기를 바라며. 


* 그림책 정보 보기 : http://goo.gl/LLEULO 



글을 쓴 최혜진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하며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1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가 3년 동안 살며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명화가 내게 묻다><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썼고, 현재는 <볼드저널>의 콘텐츠디렉터로 일한다. 그림책이라는 놀라운 예술 장르에 매료된 자발적 마감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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