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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Nov 24. 2015

올리비에 탈레크 '공감의 쓸모'

 <무릎딱지><큰 늑대 작은 늑대> 작가의 창작 노트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파리의 5층 아파트. 나무 계단을 밟을 때마다 삐그덕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채운다. 그의 집에 가까이 갈수록 떨림이 강해졌다. 깊고 단정한 시선으로 마음을 관찰하는 예술가의 집, 그 문을 열었을 때 어떤 창작의 비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 나라에서 연방재정이 적자라는 이야기는 많이들 합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에게 공감능력이 결여되었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처지가 되어보고 우리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배고픈 아이들의 눈으로, 해고된 철강노동자의 눈으로, 당신 기숙사 방을 청소하는 이민 노동자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 우리는 공감을 장려하지 않는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는 일생에 가장 중요한 목표가 부자가 되고 날씬해지고 젊어지고 유명해지고 안전과 여흥을 누리는 일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자주 합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문화사상가인 로먼 크르즈나릭이 쓴  『공감하는 능력』이라는 책에 인용된 이 구절은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 연설에서 나온 것이다. 꼭 2015년의 한국 상황을 두고 한 말 같지만 말이다. 

2010년엔 『엔트로피』  『노동의 종말』 등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제서를 쓴 석학 제러미 리프킨이 『공감의 시대』라는 책을 발표해 세상을 보는 패러다임을 바꾼 일도 있었다. 자기 자신 한 명의 번영을 위해 달렸던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공유된 사회 공간 안 다른 사람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행복과 성공을 길어 올리는 ‘유러피안 드림’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 그래서 공감능력이 최고의 리더십 덕목이 될 거란 게 책의 골자였다. 


공감이 중요한 시대로 세상이 바뀐다는 건 알겠다. 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저런 거창한 이야기 말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정말로 ‘내 이익이 상대방의 손해의 대가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믿어도 좋은 걸까? 톡 까놓고 말해 배고픈 아이들, 해고된 철강노동자에게 공감하는 것이 내 삶의 번영과 행복도 약속해주는지, 그러다가 이 험한 세상에서 호구 취급받는 건 아닌지 한 번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창의력 레슨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 연재를 포함해 ‘창작, 창의성’에 대해 말하는 수많은 책들은 저마다 같은 전제 하나를 딛고 서있다. 앞으로 창의력을 가진 인재가 사회를 이끌고 존경받을 거란 전제다. 창의력 있는 사람은 호구 취급하지 않는 사회일 거라는 전제. 그렇다면 공감이 창의력에 미치는 영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그림책 작가가 바로 올리비에 탈레크다. 그의 작품에는 두 가지 큰 경향이 있다. 

첫째, 아이가 독백 형태로 담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읊는 글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많다. 엄마가 죽은  다음날 아침, 아이가 상실을 맞주하고 투쟁해 내면의 성장을 이뤄가는 과정을 그려낸 『무릎 딱지』나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시골 할머니 댁에서 방학을 보내며 ‘엄마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 안에서 성장하는 아이의 독백을 담은  『Le Slip de bain 수영 팬티』 같은 작품이 그 예다. 

두 번째 경향은 두 명의 주인공이 동시에 등장해 이야기를 끌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올리비에 탈레크에게 커다란 성공을  가져다준 책 『큰 늑대 작은 늑대』 3부작은 나와 다른 타인을 내 삶의 반경 안에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 섬세하게 묘사한다. 글 없이 이미지로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워털루 트라팔가르』는 벽을 두고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두 병사의 이야기로 미움과 경쟁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며,  병든 금붕어로 인해 아이가 시의 의미를 찾게 되는 『빨간 물고기 레옹을 위한 한 편의 시』라는 작품은 타자를 아끼는 마음이 세상을 향한 넓은 통찰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렸다. 일본 NHK가 만화영화로 만들어 방영한 ‘리타와 마샹’ 시리즈 역시 늘 긍정적인 태도로 호기심을 발산하는 리타라는 여자아이와 귀차니즘에 빠진 강아지 마샹이 서로 티격태격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 모험기를 담고 있다. 


이처럼 마음의 작용과 반작용에 관심이 많은 그림책 작가를 또 찾을 수 있을까. 올리비에 탈레크는 타인과 연결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낡은 생각을 벗고 새로운 무언가를 창작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에게 공감능력은 ‘자비심’이나 ‘동정’과는 다른 것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다른 사람의 처지에 서보면서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도약하는 동력으로서의 공감능력. 그에겐 그것이 최대한 충만하게 삶을 살기 위한 방식이었다. 공감이 우리를 그저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우리를 ‘이롭게’ 한다는 것을, 그를 만나고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올리비에 탈레크는 


1970년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항구 도시 모를레에서 삼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파리의 고등예술대학인 뒤페레 응용미술대학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졸업 후엔 잠시 광고계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다. 1998년부터 어린이 그림책 작업을 시작해 색감이 풍부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키다 2005년 발표한 『큰 늑대 작은 늑대』와 2006년 발표한 시리즈 ‘Rita et Machin 리타와 마샹’으로 국경을 뛰어넘는 명성을 얻게 됐다. ‘Rita et Machin’은 일본 NHK에서 만화 영화로 방영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한국에서는 2009년 발표한 『무릎 딱지』라는 작품으로 특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Q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흥미로운 영상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2013년 프랑스 문화원 초청으로 서울에서 진행했던 ‘작가와의 만남’ 비디오인데요. 한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지망생들이 작업 방식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데, 작가님은 “법칙 같은 건 없어요. 취향과 느낌의 문제니까요.”라는 답을 여러 차례 하시더군요. 자기만의 느낌을 가져 볼 기회 없이 성장해 ‘한 개로 정해진 정답’을 손에 쥐어야 안심하는 한국적인 세계관과 자신의 만족감과 기쁨을 삶의 최중심에 놓는 프랑스적인 세계관이 충돌하는 순간처럼 느껴졌어요.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아는 것, 나만의 느낌을 찾는 것은 프랑스 사람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랍니다. 혼자 묵묵하게 실패하는 과정들을 버티는 힘이 있어야 ‘아, 이거다!’ 하는 순간이 오니 어렵고 막막한 게 당연해요. 서울에서 있었던 컨퍼런스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테크닉이나 그림체 같은 창작 방식에 대한 고민은 다음 단계에서 해도 괜찮다는 거였어요.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게 던져야 할 질문은 “내가 정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이지요. 어느 창작 분야든 테크닉적으로 훌륭한 사람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기만의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Q 어릴 때부터 스스로 뭘 좋아하는지 잘 파악하는 아이였나요? 그런 성향을 갖는데 부모님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제 고향 브르타뉴는 프랑스에서 무뚝뚝하고 차가운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살갑게 대화를 많이 하는 가정은 아니었는데요. 아버지가 제가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응원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직업 군인, 심지어 장군이셨는데 퇴근하고 집에 오면 늘 온갖 미술 도구를 늘어놓고 섬세한 손놀림으로 모형 배를 만들거나 뭔가를 칠하면서 시간을 보내셨어요. 낮과 밤이 완전 다른 이중생활을 하신 셈이죠. (웃음) 제게 그림 도구와 붓을 손에 처음 쥐어준 것도 아버지였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저 자신에 대해 이해하는 게 더 늦어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림책 작가가 된 뒤 학교의 초청을 받아서 아이들과 만날 때가 많은데, 미술 시간인데도 학생들이 물감 꺼내는 걸 싫어하는 선생님들이 종종 있습니다. 물통에 팔레트에 절차가 복잡하고, 교실도 지저분해지니까요. 대신 아이들 손에 크레파스를 쥐어줍니다. 진심으로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요. 아이들에게, 특히 5-6세 무렵의 꼬마들에게서 붓을 뺏지 마십시오. 붓은 가능성이 열린 도구예요. 모든 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평생을 바쳐 찾고자 하는 손짓, 감성들을 그 무렵 아이들이 가지고 있답니다. 제도권 교육과 전형화된 미 의식과 공식들… 이런 것에 노출되면서 원초적 에너지를 잃지요. 


Q 어떻게 하면 아이의 즉흥성과 원초적인 창작 에너지를 가급적 오래 보존할 수 있을까요? 

가장 쉬운 방법은 아이들 교재에 늘 나오는 ‘따라 그리기’를 피하는 겁니다. 상업화된 어린이용 그림 노트, 색칠공부 등에서 전형적인 코드들을 배우게 되거든요. 차라리 빈 종이를 쥐어주고 지금 느껴지는 기분을 표현해보라고 하는 게 낫죠. 그림 테크닉을 배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자기 느낌을 찾고 해석하는 시간을 갖는 게 훨씬 귀한 자산이 된답니다. 



Q 유년기 경험 중에 ‘이건 정말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회상할 수 있는 사건이 있나요?

아버지가 군인이셨기 때문에 3년에 한 번씩 새로운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이사를 다녀야만 했습니다. 18세가 될 때까지 브르타뉴, 베르사유, 스트라스부르, 프랑스 남부 낭시 옆 작은 도시, 동쪽의 군사밀집지역, 심지어 독일까지 생활의 터전이 계속 바뀌었어요. 새로 친구를 사귈 때면 ‘아, 이 애랑도 2년 뒤엔 헤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힘이 빠지곤 했죠. 반대로 이 경험 덕분에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응하는 법을 깨우칠 수 있었어요. 만약 아내가 오늘 당장 이 아파트를 정리하고 내일 이사 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뭐, 그래야지’ 이렇게 답할 수 있을 정도랍니다. 새로운 환경에 처해진다고 패닉에 빠지지 않아요. 여행에 사족을 못 쓰는 취향도 어릴 때 영향인  듯하고요. (그는 전 세계 40여 개 국가를 여행했고, 한국도 5번이나 여행한 이력이 있다.) 


Q 여행이 창의성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흔히 말합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걸까요? 

몰랐던 무언가를 알아보기 위해 호기심의 촉을 발동시키는 자세가 창작자들에겐 너무나 중요한데요. 결국 우리가 찾는 건 ‘놀라움’입니다. 나를 놀라게 하는 무언가와 만나야 생각이 열립니다. 빤히 다 아는 것에선 놀랄 일이 별로 없어요. 놀라려면 몰랐던 세상에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밖에 없지요. 헌데 새로운 경험이 주는 놀라움은 우리를 겁주기도 합니다. 도망가고 싶게 하죠. 어릴 때 3년에  한 번씩 익숙했던 모든 것과 헤어져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던 경험 덕에 전 놀라움 앞에서 겁먹기보다는 신이 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것 중 하나가 세계 지도와 지구본을 펼쳐놓고 소리 내서 외국 도시 이름을 발음해보는 것이었어요. 그 낯선 음율이 그 곳의 삶을 상상하게 했거든요. 요즘도 비행기 타고 이국에 가는 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막 흥분되고 좋아요.  


Q 전학 가서 새 친구를 사귄 경험이 많은 걸 보면 사교적인 아이였을 것 같은데요  

전혀요. 어릴 땐 무척 소심해서 모르는 친구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이 공포였죠. 하지만 매번 이사를 다니다 보니 제가 그렇게 말을 걸지 않으면 친구가 하나도 없겠더라고요. (웃음) 천성적으로 자연스럽게 된 일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소심함을 이겨낼 수밖에 없었어요. 


Q 당신 작품에서는 늘 섬세한 감정선이 발견됩니다. 어릴 때부터 감정과 마음의 작동 원리에 관심이 많았나요? 

네. 정말 그랬어요. 지금도 기억을 떠올리면 얼굴이 빨개지는 일이 하나 있는데요. 여섯 살 때 친구한테 군인 모형 장난감을 선물로 줬습니다.  다음날이 되니 슬슬 후회가 몰려오더군요. 결국 친구한테 가서 돌려달라고 해 받아냈습니다. 친구는 순순히 돌려줬고요. 그걸 손에 쥐고 집으로 걸어오는데 너무나 창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시는 이렇게 줬다 뺐는 일을 해선 안된다. 이렇게 무책임한 일을 내가 저지르다니… 정말 치욕스러워.’ 이런 생각을 했죠. 전에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을 배웠던 유년기의 작은 순간들이 제겐 큰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Q 한국에서 당신의 이름을 알린 『무릎 딱지』는 보통 그림책에서 다루지 않는 ‘엄마의 죽음’이라는 어려운 주제 다룬 책입니다. 읽을 때마다 눈물이 쏟아지고, 상처와 성장의 묵직한 의미를 진지하게 사유하게 됩니다. 덕분에 어른을 위한 동화로도 입소문이 났죠. 어떻게 작업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는지 궁금합니다. 

글 작가가 따로 있는 경우 전 원고를 읽은 뒤, 책상 옆으로 밀어 두고 일부러 며칠 간 보지 않습니다. 절대 원고를 펼쳐놓고 보면서 그림 그리지 않아요. 저에게 다른 사람이 쓴 모든 글은 질문입니다. 그림이라는 답을 요구하는 질문이죠. 처음 원고를 읽은 뒤 며칠 간 다른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제 내면에서 그 글을 소화하고 저만의 해석을 내줄 때까지 두고 보는 겁니다. 『무릎 딱지』의 경우 샤를로트 문드리크의 글이 정말 훌륭했기에 엄마를 잃은 아이의 마음 안에는  슬픔뿐 아니라 배반감, 화, 남은 가족에 대한 걱정 등 다양한 감정이 숨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그 모든 감정을 담을 수 있는 빨간색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과 같은 형태의 책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림책을 만들 때,  등장인물 속으로 들어가 연기합니다. 배우가 하는 일과 똑같아요. 간 떨어지게 놀라서 뛰는 장면을 그리고 싶을 땐 아틀리에에서 혼자 이리저리 뛰어보면서 느낌을 찾습니다. 최근 발표한 『Moi Devant 내가 앞이야』에서도 걸음걸이로 주인공의 성격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고 적확한 표현을 찾기 위해 연구하고 또 연구했죠. 만약 제가 슬픔과 상실감을 몰랐다면 『무릎 딱지』를 그릴 수 없었을 겁니다.  자기감정을 잘 모른다면 누군가에게 공감을 느끼는 일도, 그것을 해석해 뭔가를 창작하는 일도 어려울 겁니다. 


Q 당신 작품을 보고 있으면 인물의 포즈, 눈 모양 등 아주 작은 디테일에서 주인공의 심경이 정말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꼭 그 상황을 제가 겪은 것처럼 느껴지지요. 올해 한국에서 소개된 『똑똑한 수수께끼 그림책 1,2』가 그 정점에 있는 작품 같고요. 독자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표현 능력은 결국 당신의 공감능력 덕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 공감능력은 타고난 건가요, 아니면 후천적으로 길러진 건가요? 

부모님이 가족과 친구, 이웃을 섬세하게 돌보는 타입이어서 어느 정도 보고 배운 것도 있겠지만 관찰로도 공감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어릴 때 동네 친구들 관찰하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저 아이가 왜 저런 표정을 지을까,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상상했죠. 그러면 대하기 어려웠던 친구들이 더 가깝게 느껴졌거든요. 대학생 시절에도 길, 지하철, 카페 어디에서나 사람들 표정을 관찰했습니다. 제가 다른 기억력은 참 별로인데 이미지 기억력은 좋은 편이라 다행히도 그것들이 창작 레퍼런스가 되어 작품에서 투영되는 것 같습니다.  


Q 공감능력과 창의성의 상호관계에 대해 더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전 자의식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예술가는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예술가가 하는 일이 대개 혼자만의 공간에 앉아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작품 생각만 하는 건데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버된 자의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자기 안에 함몰되어 있는 것보다 세상을 바라보고,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새로운 경험들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봐야 합니다. 그래야 한계를 조금씩 조금씩 깨면서 성장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 상상해 보는 게 공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공감능력이 없으면 상상력도 허약해질 수밖에 없답니다. 일례로 제가 ‘리타와 마샹’ 시리즈를 그릴 때, “내가 리타였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하는 질문을 하도 많이 하니 나중에 ‘리타는 이런 목소리톤을 가진 꼬마일 거야’하며 목소리까지 들리는 경지에 이르더군요.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게 되는 거예요. 공감능력은 상상에 숨을 불어넣고 생각에 디테일을 더해줍니다. 


Q 공감능력을 훈련하는 방법을 조언해주신다면요

우리에겐 책과 영화, 사진이라는 좋은 도구가 있습니다. 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새로 나온 책, 영화, 연극, 전시를 챙겨봅니다. 앞서 설명한 놀라움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요. 작품 속 인물이 지금 어떤 기분일지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 좋은 예술에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노출시키는 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책을 읽을 때도 단순히 ‘재미있다’ ‘없다’의 표피적인 인상에 머무르지 말고, 그 작품이 나의 공감 감수성을 얼마나 자극했는지 생각해보는 방법도 있죠. 일상생활에서 가족과 친구가 고민 상담을 청해올 때도 그냥 이야기 듣지 말고, ‘내가 저 사람이었다면’ 상상력을 더해보는 것도 좋겠지요. 





Q 지난 인터뷰들을 읽다가 놀란 것이 있습니다. 그림책 안에서 글과 그림이 동어반복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지겨울 정도로 자주 하셨더라고요. (웃음) 왜 그런 철학을 갖게 되었나요? 

그림책 안에는 두 가지 언어가 있어요. 글 언어와 그림 언어가 있죠. 어떤 그림책은 그림이 삽화로서만 기능하기도 합니다. 원고에 나온 내용을 그냥 이미지로 실현해놓은 거죠. 전 그런 그림책은 질이 떨어지는 책이라고 봅니다. 글과 그림이 각각 두 개의 트랙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합니다. 글이 말하지 않은 부분을 그림이 설명하고, 그림이 비워놓은 지점을 글이 채울 것, 글 작가와 그림 작가 두 명의 해석과 관점이 독립적으로 살아 있을 것. 이게 제 작업 원칙입니다. 퀄리티 높은 좋은 그림책을 고르고 싶다면 이 원칙을 선택의 잣대로 사용해보세요. 


Q 2012년 발표한 『워털루 트라팔가르』를 기점으로 지난해 발표한 『루이 1세』 『똑똑한 수수께끼 그림책 1,2』까지 최근엔 글까지 직접 쓰고 계십니다. 짧은 글들이긴 하지만요. 

모두 그림으로 이야기의 90%를 진행시켜 놓은 책들이었죠. 저는 제 한계를 잘 알고 있어요. 앞으로도 절대 긴 글은 쓰지 못할 겁니다. (웃음) 글과 그림 작업을 다 하는 건 엄청난 에너지와 스트레스를 요구해요. 글이 전공은 아니지만 적어도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알고 있기에 도전이라 생각하고 즐깁니다. 이것도 새로운 경험이니까요. 또 아내나 가까운 작가 친구들이 조언을 해주며 중심을 잡아주고 있고요. (그의 아내는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에 2014년 후보로 이름을 올렸던 조이 소르망이다.) 


Q 몇 해 전부터 눈에 띌 정도로 그림이 단순해졌습니다. 예전엔 색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최근 작품에선 점점 간결한 선과 점, 미니멀한 요소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과거엔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을 감추기 위해 색을 더했습니다. 어쨌든 색감이 화려하면 느낌이 있어 보이니까요. 점 두 개, 선 하나로 얼굴 표정을 그릴 땐 점 위치를 조금만 바꿔도 표정의 느낌이 확확 달라집니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고요. 단순한 그림일수록 작업 과정은 복잡하고 섬세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이런 스타일도 언젠가는 바뀔 겁니다. 전 늘 제가 해보지 않은 것,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방식에 매료됩니다. 그게 목표가 되어서 저를 달리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금까지 낸 책 중에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라고 물으면 늘 마지막에 한 작품을 꼽지요. 그 시기 제가 이룰 수 있는 최대한의 진보가 담겨있다는 걸 아니까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림으로 생계를 꾸리는 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과 놀이의 경계 없이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합니다. 매일 아침 집에서 작업실로 걸어가는 15분 동안 속으로 외치며 감격한답니다. ‘이렇게 재미있게 일하며 살 수 있다니! 이건 흔하게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라고!’ (웃음) 


Q 마지막으로 그림책으로 아이의 창의성을 길러주고 싶어 하는 한국의 부모님들께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전 한국을 참 좋아합니다. 지난 5번의 여행을 통해 제주도, 지리산, 설악산 등 서울 외에 아름다운 곳이 너무나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김치도 정말 맛있고요. 한국이 극심한 경쟁사회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 환경일수록 가정에서만큼은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제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그것이었거든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허락해 준 것이요. 서점에 가서 하찮은 책을 골라와도 내치지 말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주세요. 똑같은 책만 반복해 읽어도 그냥 두세요. 엄마가 눈에 거슬린다고 말하고 자기 뜻을 강요하면 결국 아이는 엄마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때론 아이가 혼자 클 수 있게 거리를 유지하라는 당부를 전하고 싶네요. 





올리비에 탈레크가 지은 책



Bonne journée 좋은 하루 

프랑스 내 여러 신문과 잡지에 일러스트를 기고하는 삽화가 이기도 한 올리비에 탈레크가 2014년에 발표한 어른을 위한 만평 그림책이다. 촌철살인의 상황 해석력과 유머 감각을 즐길 수 있는 책으로 짧은 블랙 코미디 연극 여러 편을 연달아 본 듯한 껄껄 웃게 만든다. 


La croûte 무릎 딱지 

엄마의 죽음을 맞닥뜨린 아이가 내면의 상처와 상실감을 수습해가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 자신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마음 안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걸 알게 된 아이는 마당에서 넘어져 무릎에 생긴 딱지를 손톱 끝으로 긁어서 뜯어내며 엄마를 잊지 않으려 한다. 그 간절함이 묵직한 통증으로 다가오며, 종국에 아이가 깨우친 애도의 방법과 새로운 시작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게 된다. 한국에선 2010년 한울림어린이 출판에서 출간됐다. 


Grand loup et petit loup 큰 늑대 작은 늑대 3부작 

올리비에 탈레크가 꾸준히 함께 작업하는 몇 안 되는 글 작가 중 한 명인 나딘 브룅코슴이 글을 썼다. 낯선 존재를 친구로 받아들기까지 과정, 친구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기 위해 노력하면서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라고 웃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 사랑하는 친구로 인해 낯선 환경에서 모험을 감내하는 용기를 몽환적이고 포근한 그림으로 담아냈다. 한국에서는 2009년 시공주니어에서 출간됐다. 


Louis 1er, Roi des moutons 양의 왕 루이 1세 

권력의 속성을 날카롭게 파헤친 뛰어난 작품으로 올리비에 탈레크가 글과 그림을 모두 맡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왕관을 우연히 주워 쓰고 권력을 얻은 루이 1세가 순진하고 겁에 질린 양들(민중)을 통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냉혹한 사회에 대한 풍자이자 아이들에게 보내는 올리비에 탈레크식의 반성문. 


Waterlo & Trafalgar 워털루 트라팔가르 

서로가 왜 서로를 감시하는지 이유를 모른 채 대립하고 있는 파란색 쪽 병사와 주황색 쪽 병사의 일상을 대비시켜 보여주는 아티스트 북이다. 우리 사회가 편을 가르고 차이를 강조하며 타인을 적으로 삼기 일쑤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적도 나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책. 미움의 메커니즘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허약한 것인지 깨닫게 한다. 한국에선 2013년 미메시스에서 출간됐다. 


Le slip de bain 수영 팬티 

『무릎 딱지』에서 호흡을 맞췄던 샤를로트 문드리크가 글을 썼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시골 할머니 댁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게 된 아이의 성장기. 출발 전에는 최악의 바캉스가 될 거라 툴툴대던 아이는 엄마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하나 둘 만들어가며 한 계절 동안 부지런히 성장한다. 책의 마지막, 3미터 높이의 다이빙대에서 용기를 내 수영장으로 뛰어드는 장면은 후련한 성장의 피날레다. 


Moi devant 내가 앞이야 

『큰 늑대 작은 늑대』의 나딘 브룅코슴과 다시 한번 협업했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따끈따끈한 신작. 처음 읽을 때는 서로 키와 능력이 다른 3명의 친구가 ‘누가 앞에 서서 갈 것인가’의 문제로 고민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거듭 읽다 보면 ‘보호’와 ‘자율성’ 사이 균형 잡기에 대한 이야기란 걸 알 수 있다. 보호가 간섭이 되지 않고, 자율성이 방임이 되지 않는 지혜가 따뜻하게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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