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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jinsung Dec 31. 2023

누끼 150개 따는 디자이너가 두려움에서 생존하는 법

‘앞으로 디자이너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2024 새해를 맞이하며

10여 년 전 내가 다닌 대학에서는 디자인을 잘하는 방법으로 사고보다는 기술을 더 많이 배웠다. 일명 ‘누끼 따는 법’, ‘합성하는 법’, ‘붓질하는 법’ 등 시각을 표현하는 프로그램이나 툴들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고, 당시에는 누가 더 화려하게 표현을 잘하는지로 수행평가 능력을 좌우받았다.


여느 모든 디자인 대학 과정이 다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경쟁에 기반한 실기 시험과 각종 공모 대회에 익숙해져 손은 빨라졌고 생각은 더뎌짐을 어느 순간 체감하였다. 다행히도 당시 나의 하숙 메이트들은 경영학과 경제학도 친구들이었고, 그 친구들의 타 대학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며 그간 하숙 골방에서 캔버스에 머리만 숙이고 있던 나의 시선을 뒤흔들어 주었다. 여대 안에서도 어렵게 재수해서 들어온 기센 언니들 사이에서 성적도 좋으려니 내게 대학 시절은 그저 피 말리는 군대 같았는데 다른 학교 캠퍼스를 넘나들며 경쟁에 익숙해진 자아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선을 탐구하기 시작하니 대학의 묘미를 진정 느낄 수 있었다.


대전에서 갓 상경한 시골 아이는 옆 동네 학교인 성균관대 경영학과 오빠들 따라 MT도 가고, 항공대 캠퍼스에 가서 농구 동아리도 하고, 동국대에서 진행하던 연합 광고 동아리, 홍대 커뮤니티인 영어 동아리 활동까지 캠퍼스 방방곡곡을 헤집어 다니며 나 혼자 잘하는 디자이너가 아닌 사회에 필요한 디자이너를 꿈꿀 수 있었다. 특히 4학년 졸전 준비 기간 때에는 과 수업이 많이 줄어들면서 작업 시간이 많았었는데, 당시 세종대 재학하고 있는 친구의 학생증을 빌려 친구의 경제학과 수업도 몰래 듣고, 남의 학교 도서관에서 친구의 경제학 책을 필사하기도 했다. 그때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을 배우면서 지금의 디자이너로서의 경제 가치관 정립에 많은 영감과 깨달음을 주기도 하였다. 내가 만일 대학 때 딴짓들을 많이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 브랜드를 운영하는 데에도 가치관이나 방향이 완전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월간 디자인 1월호에서 <시대예보-핵개인의 시대> 송길영 마인드 마이너 부사장님의 ’ 앞으로 디자이너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인터뷰가 있었는데, 이제는 ‘누끼 150개 따는 게’ 자동화될 확률이 높다는 건 자명할 일로 행위가 자동화될수록 디자이너들도 생각이 깊어져야 한다는 일침을 가하였다. 생성형 AI가 전형의 패턴이 있는 창작은 충분히 모사하고도 잠재적 패턴까지 모든 우위를 뛰어넘을 수 있기에 전형성이 없는, 다시 말해 상투적 방식으로는 패턴을 읽는 게 아예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깊게 와닿았다.


디자이너들도 앞으로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잘 관찰하고, 변화하는 시대와 공명할 수 있으면서도 고유성 있는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직업 정신을 가르쳐 주시는 듯했다. 인터뷰 전문을 읽으며 앞으로 디자이너가 지녀야 할 주요 키워드를 뽑아 봤는데,


서사, 고유, 교류


나만의 자취와 이야기가 담긴 서사를 만들 것

전형성을 탈피한 나만의 스타일 또는 전형성을 우위 할 수 있을만한 압도적인 감각의 고유성을 키울 것

변화하는 세대 및 새로운 집단들 그리고 플랫폼을 통해 알리고 교류할 것


과거에는 이 중 하나만 잘해도 재야의 고수로 발굴될 수 있고 우연하게라도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정보 오픈 시대에 범람하는 콘텐츠는 물론 모두가 프로라고 자랑하는 플랫폼이 많아지면서 결국 스스로의 이야기를 잘 알릴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누끼도 잘 따야 하는 현시대이지만, 패스와 패스 사이에 끊임없이 나만의 질문과 기획을 더하며 작은 틈들 속에서 나만의 이야기가 발현될 수 있도록 접점을 늘려가야 할 것이다. 송길영 부사장님이 화두를 던지신 키워드 세 가지는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겹겹들이 매우 얄팍하면서도 마라톤과 같은 정량적 수집을 요하니 막연함에 오는 두려움도 있다. 그럼에도 시대의 변화에 촉을 곤두세우고, 함께 공부하고, 끊임없이 교류할 것. 이번 2023년도를 갈무리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문장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용기는 두려움의 부재에서가 아니라 두려움에 저항하려고 애쓸 때 생긴다’는 송길영 부사장님의 격려가 필요한 새해이다.

두려움이 존재해야만 용기 또한 생기는 것. 길고 긴 시대에 나만의 서사를 만들기 위한 긴 책을 써내려 간다는 마음으로 두려움을 받아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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