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끝, 제주에서 보낸 여름날의 책
제주에 사는 미설 언니는 근 4년을 보내오며 그동안 제주의 변화무쌍한 계절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제주 도민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오랜만에 안부를 전하며 회고했다. 그간 여름날이 될 때면 제주의 엄청난 폭염을 원망하기만 하며 운영하고 있는 레스토랑과 집에만 오가다가, 우연히 근처 지역에서 열린 작은 여름밤 콘서트를 다녀오고 마음이 바뀌었다고 한다. 지인을 통해 제주인들이 왜 그렇게 이맘때만 되면 바다로, 산으로 뛰어드는지 이유를 알게 된 후 비로소 제주의 계절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았다며. 제주의 겨울 또한 냉혹하게 길고 추워서 여름날의 찬란했던 추억으로 긴 겨울나기를 버티는 거라고 한다.
얼마 전에는 옆집 이웃이 키운 수박을 받았는데, 원래 제주 수박이 달지 않기로 유명해 기대가 없었지만 올해는 생각보다 정말 달아 놀랐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마당에 심은 무화과나무가 처음 열매를 맺어 설레는 마음으로 따왔는데 예상보다 달지 않아 시무룩했다는 언니의 심각해진 눈빛을 보며 새삼 날씨가 이렇게 누군가의 여름을 뒤흔들 만큼 중요한 이슈구나 싶었다. 밤낮으로 밝은 인공조명과 풀가동되는 에어컨 덕에 여름이었는지, 겨울이 오는지 계절감을 잊고 살았던 도시인으로서는 미설 언니의 걱정을 깊이있게 공감해주지 못했다.
그날 밤 언니가 따온 무화과는 결국 설탕을 가득 뿌려 함께 맛있게 먹었지만, 마치 내 인생이 서울에서 만들어진 백설탕 같다고 느껴졌다. 날씨나 계절 따위의 영향도 받지 않고 기능도 일관되지만, 내 사소한 변화에 누군가 기뻐하거나 시무룩해하지도 않을 것 같은 그런 인공 감미료. 역할을 잘해내면 당연한 것이고, 품질이 떨어지면 그저 라벨이 떼어지고 낙오될 것만 같은. 제주의 과일이 부럽기는 처음이었다.
8월의 끝자락에 다녀온 제주의 바다 냄새가 희미해질 즈음, 미설 언니가 책을 선물해 주었다. 이미 서울로 올라오는 길 친정엄마가 방앗간 참기름을 챙겨주듯, 먹어보고 맛있었다는 오일에, 와인에 이것저것 다 챙겨주고는 제목까지 끝내주는 책을 보내왔다.
이슬아 작가님의 『끝내주는 인생』. 미설 언니는 제주에서 내가 설탕 같다고 느낀 마음을 알아챈 것이었을까. 책 보다가 혜진이 생각이 나 보낸다며. 책 구절 속 문장들을 통해 제주에서 보내는 공감과 위로를 대신해 주는 것 같았다.
‘찬바람 불면 왠지 속이 깊어져야 할 것 같은데, 더 점잖아지고 어른스러워져야 할 것만 같은데, 아마도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시간은 흐를 테고 친구랑 나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다.’
다음 내려가는 여름 해에는 언니네 마당에 키운 작은 무화과 열매가 좀 더 달아지기를 바라며 날씨 예보를 열심히 들여다봐야겠다. 그리고 자주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볼 것이다. 아마도 잘 되지 않겠지만 다시 재회할 때까지 부디 설탕이 아닌 무르익은 무화과 같은 사람이 되어 내려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