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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혜진 Aug 21. 2016

빈 휠체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빌린 휠체어를 반납하러 가는 날. 지도상으로는 걸어서 37분 2.4km가 걸린다고 했다. 빌려올 때는 택시에 태워서 가지고 왔었다. 중형 택시의 트렁크에는 들어가지 않아서 뒷좌석에 비스듬히 눕혀 넣어야 했다. 그마저도 택시 두 대를 보냈고 세 번째 만난 기사님이 휠체어를 태워주셨다. 알고 보니 젊은 시절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휠체어를 탄다고 했다. 아내가 휠체어를 탄 이후에 건물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지어졌는지 알게 됐다고, 집안에서도 화장실이나 방에 갈 때 문턱을 넘어야 했다고 말씀하셨다. 무릎 수술을 받은 엄마는 정말 기사님 말씀처럼 휠체어를 타고 문턱을 넘어 다녀야 했다. 턱 하나가 산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렇게 두 달 반이 흘러서 휠체어를 반납하는 날이 됐다.


하루하루는 더뎠는데 2주쯤이 지나 뒤돌아보면 시간이 훅 흘러가 있었다. 엄마의 무릎도 더디지만 분명히 나아가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계시던 분이 앉아서 휠체어를 타고 서서 목발을 짚고 목발을 떼고 뒤뚱이며 걷다가 점차 몸의 균형을 잡아 걷기 시작했다. 휠체어는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난 지도가 추천해 준 길과 시간을 무시하고 내가 아는 나무가 우거진 길을 골라 휠체어를 밀고 가기로 했다. 연일 폭염 경보를 알리는 날씨였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걸어가 휠체어를 반납하고 담당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나무 아래를 걸어서 그런지 더위는 견딜 만했다. 가끔 바람도 불어주었다. 간혹 불쌍하다는 듯 나와 휠체어를 번갈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과 마주쳐야 했지만 나도 그들을 쳐다보았다. 까치 두 마리가 푸드덕 나무 위로 날아갔다. 고개를 돌렸을 때 저만치에서 노부부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휠체어를 탄 채였다. 할아버지가 휠체어에 앉아 발을 구르며 엉거주춤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고 등이 굽은 할머니가 천천히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엄마의 무릎 수술을 겪지 않았더라면 두 다리를 쓸 수 있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왜 휠체어를 타시는지 의아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마다 이유가 있다. 허리가 아프실 수도 있고 걷기에는 다리에 힘이 부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입원해 계신 병실의 할머니들도 그랬다.   


엄마가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고 나가면 다리 수술을 해 본 경험자들이 너도 나도 몰려와 한 마디씩 걸고 자기 얘기를 술술 꺼내놓더란다. 난 그걸 무릎 고해성사라고 불렀다. 엄마는 인생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아프기 전에는 아픈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고 했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공원에서 쉬고 길을 걷고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이 실은 언젠가 걷지 못해 입원을 하고 휠체어와 목발을 쓴 경험이 있더란다. 


빈 휠체어에 지난 두 달 사이의 기억들이 앉아있다 떠나갔다. ‘제가 이 모양입니다.’라고 기도했던 나도 앉아있다 떠나갔다. 엄마가 일어나 걷게만 해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기도했던 내가 이제 엄마가 걸으시고 집안일도 조금씩 돌보시자 긴장이 풀려 휠체어 반납하는 걸 두고 며칠 전부터 혼자 화를 내고 있었다. 더웠고 짜증이 났다. 한 시간이면 여름 햇빛과 이따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속에서 기분 좋게 휠체어를 반납할 수 있는 거였는데. 걸어서 내 힘으로. 도대체 왜 며칠 동안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았을까. 내 취미는 걱정 근심인가.    


휠체어에 엄마가 아니라 나를 태우고 긴 긴 여름을 지나온 것 같다. 내가 엄마를 돌보느라 휠체어를 밀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실은 내가 무거운 나를 밀고 가는 거다. 휠체어에 정말 아무것도 남게 되지 않을 때까지 밀고 밀어서 그렇게 가는 거다. 엉덩이가 커서 밀기 무거웠던 휠체어가 텅텅 빌 때까지 미는 거다. 한여름의 상쾌한 변화. 엄마는 걸으시고 휠체어는 가벼워졌다. 휠체어가 비었다. 그래서 빌렸던 곳에 다시 반납할 수 있게 됐다. 휠체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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