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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혜진 Feb 27. 2018

눈에 보이는 것


  “오늘 여기까지 오면서 뭘 보았나요?”

  “별 거 없는데요.”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5년 전 우울한 나에게 심리상담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공원을 가로질러 걷던 내가 본 것은 공원 벤치에 둘러앉아 장기를 두시던 할아버지들이었다. 아직 일하실 수 있는 분들이 옹색한 모습으로 모여계신 모습이었다. 장기판을 비추는 오후의 햇빛이 따스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할아버지들이 일을 잃어버렸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날의 풍경에서 내가 느낀 것이 스스로에 대한 감정일 수 있다고 상담사는 말해주었다. 당시에는 그 말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 모습이 일 없는 할아버지들과 비슷하단 말야?’ 속으로 발끈하기도 했다. 일을 잃은 사람은 나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언젠가는 장난감을 파는 할머니를 보았다. 바람개비, 형광 막대, 풍선, 장난감 칼 등이 펼쳐져 있었다. 장사는 잘 되지 않았다. 할머니 앞으로 교복을 입은 학생들, 배드민턴 치는 사람들, 키스하는 커플, 치킨 배달부, 아이와 함께 소풍을 나온 부부가 차례로 지나갔다. 할머니 주변을 배회하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걷고 또 걷던 나는 할머니가 짐을 싸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펼쳐놓았던 장난감들을 챙기는 모습이 달팽이처럼 느렸다. 자전거 한 대에 저 많은 물건들을 어떻게 다 싣나 싶었는데 우선 솜사탕 기계를 자전거 앞쪽에 고정시키고 장난감들을 차곡차곡 상자에 넣고 보자기로 싸서 솜사탕 기계에 넣고 자전거 뒤에도 쌓아 올렸다. 할머니는 짐 때문에 덩치가 커진 자전거를 끌고 가셨다. 할머니는 내게서 점점 멀어졌고 작아졌다. 왜 그렇게 할머니를 바라보았을까. 작은 할머니가 많은 짐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일 수도 있단 걸 나중에야 알았다.      


  봄에는 꼭 신이 난 개들이 보였다. 개들은 꼬리를 하늘로 치켜세우고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주인은 봄 햇살을 쬐며 흐뭇하게 개들을 바라보았다. 개꼬리처럼 하늘로 솟은 새싹은 빛깔이 참 좋았고 이 풍경을 보는 나도 참 좋았다. 함께 화사해졌다.


  다시 흐리고 비 오는 날이 찾아왔다. 죽은 채 연못에 빠져 있는 까치를 보았고 나지막한 산에서 파리가 꼬인 토끼 머리를 보기도 했다. 몸통은 다른 짐승이 먹어버린 모양이었다. 왜 그러한 것들이 눈에 보이는지 참 이상한 일이었다. 30대라는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나는 늙음과 죽음의 기운만을 가득 끌어안고 있었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부둣가처럼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간은 그 와중에도 담담하게 흘러갔다.


  지금은 안다. 내 눈에 보였던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동물들도 실은 다 나의 모습이었다는 걸.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나를 투사했다는 걸. 할아버지는 일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 수도 있고 할머니는 짐을 진 사람이 아닐 수 있으며 동물들도 그저 자연의 순환 속에 있었던 거란 걸.


  또 봄이 온다. 할아버지의 등을 따뜻하게 덥히던 햇살처럼, 할머니의 느리지만 강단 있는 손짓처럼, 하늘로 치솟던 개들의 꼬리처럼, 죽음을 맞이한 동물처럼 그렇게 용기가 샘솟아서 나는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일에 인사를 건넨다. 내 안에서 과거의 내가 죽고 다른 내가 태어났으니까. 언제 또 날씨가 변할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는 새싹처럼 자란 나를 보고 싶다. 결코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우울의 동굴에서 나는 이렇게 걸어 나간다.


 2016년 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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