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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주 Mar 16. 2024

구설수

재미로 보는 사주에는 언제나 구설수가 떠있었다. 어디서 점을 보던 사람들은 항상 말을 조심하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놈의 말말말, 누군가 3n 년 인생에서 이미 뱉어버린 말을 후회했던 순간들을 이야기해달라고 한다면 아마 꼴딱 한 달은 밤을 새야 할 것이다. 그렇게 후회하며 사람들에 섞여 살다 보니 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더라. 입안으로 꿀떡 삼켜버려야 하는 말과 어떻게든 내뱉어야 하는 말.

10~20대만 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친구들과 함께 하하 호호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내가 날려 보낸 말들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그들의 마음속에 박히거나 사람들을 돌며 점점 몸뚱이를 불려 가는 모습을 보며 그저 어떤 말이든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내 입에서 빠져나간 말들을 되새김질하며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말을 더 아끼리라고 다짐하고는 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입에 머물던 말들은 삼켜지기는커녕 쉬이 닫히지 않는 입 밖으로 나가기 일쑤였다.


대학교를 다니던 어느 봄날, 함께 다니던 무리의 사람들 중 유일하게 나이가 같은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소심하기도 하지만 본인을 사랑할 줄 몰랐다. 그 모습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무례하게 대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언제나 친구 편을 들어주느라 바빴고, 친구는 무시하는 말에 허허 웃으며 동의하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하루는 친구를 붙잡고 자존심도 없냐고, 왜 스스로를 자꾸 포기하냐고 물었다.

그때 친구가 울컥하며 소리를 질렀다.

“야, 나도 알아! 나도 안 그러고 싶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미 왕따 당해봤단 말이야!”

순간 마음에 엄청 커다란 바위가 쿵. 하고 떨어졌다.


친구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무리에서 함께 떨어져 나오자고 다짐하며 앞으로의 하루가 더욱 나아지길 바랐다. 하지만 친구는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무리에서 나오고 싶다고 자신을 꼬신다며 이야기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내 성질에 못 이겨 결국 싸움을 하게 됐다. 여기까지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꽤 괜찮았다. 후회되는 것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내 하찮은 혀는 불같이 들고일어나는 심장을 받아내지 못했다. 결국 내 혀를 통해 나온 말들 중에 친구의 과거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그건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건 아니었다. 그 순간에 친구의 눈에 차오르던 눈물은 잊을 수 없다. 그날 내뱉은 말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후회한다.


그때 이후로 더욱더 말을 많이 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많이 말하면 그만큼 실수가 많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말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몰랐으니 그저 모든 말을 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말실수들을 하며 누군가의 마음에 생채기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대학시절을 살았다. 매번 혼자 흡연구역으로 가 담배를 하나 입에 물면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있을걸.이라고 생각하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조금 더 나이를 먹어 회사를 다닐 때쯤, 차장님을 만났다. 차장님은 첫인상부터 굉장히 신뢰가 가는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 다니던 회사는 공무원들이 원하는 니즈를 찾아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일이었어서 꽤나 말발이 중요했다. 그만큼 남을 현혹시키고 신뢰를 가게 할 언어구사능력이 있어야 했고, 또 매력적인 글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중요했다. 회사를 다니며 나에게 대화, 말이라는 것이 더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졌었다. 믿음과 환상을 주기 위해서는 어느 때는 오버하기도 해야 했고, 어떨 때는 공무원들의 짜증 나는 농담들도 받아줘야 했기 때문이다. 해야 하는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구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졌다. 또, 장기 출장도 꽤 있어서 우리 팀은 함께 다니며 움직이는 일이 많았다. 지방의 공무원들과 많은 술자리를 가지며 우리 팀의 막내이자 유일한 여자로서 언제나 가방에 딸린 키링처럼 차장님을 따라다녔다. 차장님은 항상 세상 밝은 웃음과 다정함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나이 많은 공무원들의 받아주기 힘든 농담들도 항상 재치 있게 넘기는 모습이 세상 사는 게 누구나 다 쉽지 않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끼게 해 주었다. 그 와중에도 항상 다정한 차장님을 존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나간 출장에서 지방의 나이 많은 공무원들과 함께 술자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한 공무원이 딸랑딸랑이라며 손을 흔들며 남자들끼리 술 한잔 더 해야지.라고 운을 떼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공무원들도 그래그래 그러자. 남자들끼리만 해야지.라고 하며 허허 웃기 시작했다. 팀장님은 웃으며 나를 가리키며 얘는 어쩌죠?라고 농담조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이놈의  늙은이들이 왜 이러나 싶었다. 그래서 그저 막내로서 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렇게 짜증 나는 상황에서도 다정하던 차장님이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런 곳 안 갑니다. 막내는 제가 데리고 들어가겠습니다.”

순간 적막이 흐르며 모두의 얼굴에 흘러넘치던 웃음이 막을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팀장님은 차장님 팔을 붙잡으며 왜 그러냐고 이야기했다. 차장님은 정색하는 얼굴로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전 빼주세요. 다시는 이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차장님은 얼른 따라 나오라고 이야기를 하며 앞장서 걸었다. 차장님을 놓칠세라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따라나섰다. 술집에서 꽤 멀어지자 차장님은 슬쩍 웃으시며 이야기하셨다.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자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 만약 다음에 내가 없다면 스스로 이야기하고 빠져나와야 해.” 순간 얼마나 멋있었는지 모른다. 나를 지키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말들에게 진중함을 입히려면 언어뿐 아니라 얼굴표정과 목소리도 맞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경험한 날이었다.


최근 가슴이 답답했다. 친구들을 만나고 통화를 하는 상황에도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았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항상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터라 이런 느낌이 더욱더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것 같았다. 10~20대에는 속에 담아두어야 하는 말들과  쉽게 입 밖으로 튀어나와서 힘들었는데 어느덧 30대 중반을 지나가니 이제는 어떻게 대화를 했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친한 친구를 붙잡고 그냥 무작정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뱉어보려고 했다. 근데 입 밖으로 나오는 그 어떤 단어도 나를 대변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로 바꾼 직업은 여전히 말과 연관이 있다. 이제는 정말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말만 한다. 하지만 그 말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말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되지 않는다. 무언가 커다란 뭉텅이가 몸속에서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하다못해 꼭 해야 할 것만 같은 말들도 가슴에 뭉쳐 얽히고 얽혀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 엉키고 엉킨 수많은 말들이 명치에 콱하고 눌어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데 매일 그 위로 천 가지 말이 규칙도 없이 쏟아짐을 느낀다.


예전의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살았던 가.


새로운 해를 맞아 답답한 가슴이 조금은 풀리길 바라면서 신년 사주를 보러 갔다. 점을 봐주는 사람은 올해 구설수가 있다며 말을 조심하라고 했다. 어떻게 맨날 구설수가 있냐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올해 사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가깝지만 손은 닿지 않는 거리에 앉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참 동안이나 내뱉고 있는 고양이를 보니 이미 구설수가 시작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집 고양이는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어떤 말이던지 내뱉어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부럽게 느껴졌다. 다음생에는 고양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 태어나 내 가슴에 꾹꾹 눌러 찬 이 수많은 말들을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거리낌 없이 내뱉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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