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지 않으면 사라지는 일상의 틈 속에서
틈틈이 쓰고 싶은 글을 기록해두는 블로그를 소개하는 짤막한 글이다. 검색의 파도를 통과한 누군가 잠시 머물다가도, 때론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는 곳. 대개는 소리 없이 고요함을 유지하는 차분한 공간이기도 하다. 일상을 잠식한 코로나로 인해 두 아이를 끼고 있는 집콕 생활이 길어지면서 내가 사랑하는 하루의 ‘틈’마저 실종된 몇 달을 보냈다. 끼적거리다가도 이내 곧 미완성인 채로 체념하고 포기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매일 빈 종잇장을 마주하고 구름 속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끌어내야 한다는 것은
몹시 고달픈 일이다_ 트루먼 카포티
이따금씩 들이치는 단상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었을 뿐. 정제된 글 한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조바심과 함께 부작용도 생겼다. 가족이라는 안정된 울타리 안에서 엄마가 지녀야 할 두터운 ‘책임감의 성’은 생각하는 것보다 견고하고 빈틈이 없어야 하니까.
쏟아지는 코로나 속보에 잔뜩 긴장하고 날 선 예민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래도 역시나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 맞다. 드러내고, 나서고, 애써 움직이는 모든 바깥 생활들이 부담스럽고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집콕 라이프가 익숙해지는 날이 온 것이다. 문제는 바깥 세계로의 노출을 줄일수록 집안에서 감당해야 할 영역이 늘어가고 그만큼 내가 소화해야 하는 역할 또한 점점 많아질 수 밖에. 이내 과부하가 걸려 유리멘탈 내면에 경고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 무엇보다도 견고하고 안정된 ‘집 안’이지만, 정작 그 집에 머무르는 나의 내면의 세계는 온통 식구들의 니즈에 초점을 맞추어 움직이다보니 생각하거나 여유부릴 ‘틈’자체를 찾기가 어렵다. 뭔지 모르게 나 혼자만 모든 것이 멈춘 곳에 불시착한 착각마저 든다. 끝을 알 수 없는 팬데믹의 시대. 점점 집 안에서 쓸모 없는 구닥다리가 되어가는 것 같은 초라한 기분은 대체 무엇일까.
메리 올리버가 말한 딱 ‘초조한 사십 대’...... 마음의 무기력함이 글의 무기력함이 된다던 글귀를 책에서 마주하는 순간, 깨닫는다. 내 소중한 일상을 지키려 애쓰는 동안 내면엔 무기력증이 잠복하고 있던 것이다. 무료하고 무기력했던 나날들. 그래서 아무 글도 낙서도 끼적이지 않고 싶었던 거구나.
그제야 ‘반짝!’하고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내 마음을 표현해 주는 시인의 언어가 이렇게 정확할 수가 있는 건지. 집과 공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제한된 동선도 한몫 할테고, 햇살 한 줌이 그토록 소중했음을 체감하는 장마 국면도 침잠하는 무기력을 한껏 더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던 그때였다.
나의 모습이 닳고 닳아 한없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엄습하는 날엔 주저하지 않고 짙은 민트색 책 한 권을 집어 든다. 하루하루가 지치고 버거울 때, 마땅히 쉬어갈 곳이 필요할 때 말이다.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 은 그 자체로 내게 쉼을 준 책이다. 아이가 어릴 적 집안에서 ‘독박 육아’에 시달리다 낮잠이 들 무렵이면 유모차를 태워 공원으로 산책 나가면서 늘 끼고 다녔기에 애착이 남다르다.
집만 아니면, 방구석만 아니면, 그냥 밖으로 나가 질감이 다른 바람과 온기가 다른 햇살이 있는 곳으로 나가면 그만일 테지만. 그마저도 예전처럼 자유롭지 않기에, 집콕 요정들과 한 몸인 채로 지내야 하는 요즘이니까. 이럴 땐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한다. 큰 아이는 레고와 함께, 작은 아이는 구슬퍼즐을, 나는 종이 접기와 장난감, 교과서가 함께 뒹구는 식탁 한켠을 자리하고 겨우 민트빛 책 한 권을 펼쳐 든다.
세상에 시작하고 전진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연필은 없어. 우선 많이 쓰는 게 최선이야. 어조가 틀리면 아무것도 맞는 게 없어. 마음의 무기력함은 글의 무기력함이 되지. 태양도 작업 스케줄이 있어. 눈도, 새들도, 초록 잎사귀도. 너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 중략 무엇보다도, 일단 써봐. 노래해. 피가 혈관을 흐르는 것처럼. <완벽한 날들> 가자미, 일곱 l 메리 올리버 l 마음산책(2013)
(가자미’ 연작시는 <푸른 목장> <서풍> <겨울 시간들>에 실렸다. 가자미는 작고, 가시가 많고, 그리 중요하진 않지만 조화로운 물고기다.
_ p.125 옮긴이 각주)
강요된 거리두기로 인해, 헛헛했던 기분은 바로 마음의 무기력함이자 글의 무기력함이었던 것이라고 작가의 언어를 빌려 표현해 보기로 한다. 가족 안에서 소중한 일상을 지키려 나의 역할을 성실하게 소화하는 가운데, 외부와의 접점은 소실되어 가다 보니 내면의 세계가 점점 작아지고 움츠러들었다. 밖으로의 확장을 꿈꾸기엔 현실은 점점 더 안으로 깊숙이 수렴 중이었다.
주기적으로 참여했던 도서관에서의 그림책 모임은 잠정 중단된 지 반년이 다 되어 가고, 아이 학교에서 매주 책을 읽어주는 리딩맘 활동 역시 등교 개시가 늦어지고 학교 내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연유로 올해는 아예 불가능해졌다. 매주 하루씩,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 내지 15분. 아이들에게 어떤 책을 읽어줄까 고심하고 또 고민하고 헤맸던 밤이 그리워질 지경이다. 물론 집에서 내 아이들을 꼭 껴안고 잠자리 시간에 읽어주는 시간도 특별하고 소중하지만, 학교와 학원 수업에 바쁜 학교 친구들을 만나는 그 짧은 시간은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과 더불어 한 뼘 성숙히 자라게 하는 단비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책을, 글을 읽어주는 사람과 이야기를 듣는 이를 기억한다. 기억을 잃은 아내 앨리 곁에서 젊은 시절의 일기를 읽어주던 남편 노아가 나오는 영화 <노트북> , 사자가 책을 듣는 시간에 푹 빠진 그림책 <도서관에 간 사자> , 잠 못 드는 마르셀을 위해 침대맡에 앉아 책을 읽어주던 엄마의 목소리가 새겨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사실 낭독은 일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성우 못지않게 낭랑한 소리로 <메이와 가부> 이야기를 매끄럽게 소화하는 그림책 모임 대선배님을 비롯해 자신만의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던 멤버, 책의 텍스트는 물론 단어 하나에서도 의미를 끄집어내어 자신만의 레퍼토리를 꿰어나가는 작가 선생님, 그리고 코로나만 아니었더라면 학교에서 아이들과 눈 맞추고 책을 읽어주고 있을 엄마들... 그리고 아주 가끔(!) 좋은 사이일 때면 서로에게 책을 읽어주는 우리 아이들도.
책은 우리를 타자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란다. 그리고 나 자신보다 더 나와 가까운 타자는 없기 때문에, 나 자신과 만나기 위해 책을 읽는 거야. 그러니까 책을 읽는다는 건 하나의 타자인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행위와도 같은 거지.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p.112중에서)
| 마르크 로제 | 문학동네 (2020)
책하고는 담을 쌓고 살던 스무 살 청년 그레구아르가 책방 할아버지 피키에를 만나면서 낭독의 즐거움과 우정, 인생을 배워가는 소설책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를 읽으며 그 어느 때보다 만남과 소통을 갈구하게 되는 요즘 ‘함께 읽기’의 가치가 얼마나 의미 있는지 다시금 생각한다. 읽어줄 책을 고르고, 소리를 내어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주고,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고, 자신만의 레퍼토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 면면에 책방 할아버지 피키에 씨가 나누어주는 그만의 철학과 노하우는 인생의 연륜만큼이나 독보적으로 반짝거린다.
개인의 취향이 고루 묻어난 그림책을 선별해 와서 차근차근 목소리를 내던 그림책 모임 멤버들을 만나지 못해 아쉬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아직 어린아이들을 돌보느라 시간 내기가 쉽지 않은 자리에 있기에 예전처럼 아무런 걱정 없이 만나는 날을 기다리며 지금은 각자의 일상 속에서 고유의 레퍼토리를 축적하는 시간으로 삼기로 한다.
Like A Fermata
아무 조건 없이 나 자신이 되는 일.
일상의 틈새 사이, 늘임표를 새겨 넣는 일.
도로시 앨리슨은 말했다. 일기를 목격자 겸 저장소 겸 놀이터로 생각한다고. 그곳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고 생각을 명확하게 다듬는다고 말이다. 가상의 작업실인 동시에 현실 속 나만의 글방에는 일기 같은 일상이 소리 없이 쌓여간다.
나는 시간을 한껏 잡아늘이고 싶고,
아무 조건 없이 나 자신이 되고 싶다.
<불안의 책, 14중에서> | 페르난두 페소아 |
문학동네(2019)
순간을 오래 붙들어두는 몰입만으로 내가 있어야 할 ‘책임감의 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나로 존재할 수 있음을 느낀다. 설익은 에세이일지라도 가만히 말을 건네는 풍경을, 단 한 번 뿐일 어린아이의 눈과 몸짓을, 보다 깊어지는 나의 나이를, 부모님의 뒷모습을, 읽어 내려간 책과 글을, 유년의 한 시절을, 내 곁에 머무는 사람들을 나만의 시선으로 오래도록 안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