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건너, 메라키(μεράκι)를 만나러 갑니다
****
메라키(μεράκι)란?
: 어떤 일에 마음, 열정, 정성, 영혼을 담는 방식을 뜻하는 그리스어.
****
자그마한 유리잔 하나를 꺼낸다. 잔에 미지근한 물을 담는다. 물잔에 펜촉을 담가둔다. 그리고 기다린다. 한동안 뚜껑을 열지 않아 굳어버린 만년필을 되살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얼른 컴컴한 동굴 속에서 깊은 겨울잠 자는 만년필을 깨우러 가자.
스르르... 물잔 속에서 진한 먹빛 연기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한없이 자유롭게 피어오른다. 그 안에서 만년필도 울었을까. 게으른 주인 만나 원치 않은 동면에 들어가야 했던 하나뿐인 파버 카스텔 만년필. 이렇게 깨워서 미안. 카트리지 안에서 딱딱하게 굳은 블랙 잉크는 물을 만나 꽁꽁 얼었던 마음을 풀고, 본연의 쓰임새로 기능을 하기 위해 액체로서의 준비를 마쳤다. 물잔에서 꺼내진 펜촉을 휴지로 닦고 이리저리 손으로 만지다가 그만 양손 엄지 검지가 금세 얼룩덜룩해졌다. 손가락 지문 사이사이 잉크가 배어든 자리마다 무채색의 불규칙한 무늬를 입었다.
어린아이처럼 물감 놀이를 한 것도 아닌데 순간 지저분해진 손가락을 보니 웃음이 삐져나온다. 이렇게 될 줄 몰랐나 한숨도 나온다. 알고서 미리 대비를 했더라면 얼룩 한 점 없이 깨끗하게 산뜻했으려나. 그런데 아무리 닦아도 손에서 사라지지 않는 잉크의 잔흔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 건 왜일까. 검은 잉크가 새고 묻고 번진 지금의 순간이 뇌 속에 스틸컷처럼 저장될 테니까. 만년필을 꺼내 들어 펜촉을 바라볼 때 또 한 번 인트로 장면처럼 쓱 지나가겠지. 다음번 잉크 카트리지를 교체할 때는 손이 얼룩덜룩이가 되는 실수를 좀 줄이겠지. (과연?!) 얼룩을 지우려 미온수에 비누를 칠해 거품을 내어 양손을 비벼댄다. 몽글몽글 부드러운 하얀 거품 속으로 검은 잔흔들이 소리 없이 스르르 빠져나간다. 완벽히 깨끗해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무스름한 빛깔은 제법 옅어졌다.
단잠을 자고 있던 만년필을 깨우고 따뜻한 물에 손까지 녹이고 나니 몸도 정신도 정갈해진다. 자, 이젠 손을 움직여야 하는 시간. 만년필 펜촉 길이 잘 나아갈 수 있게 굳었던 손도 풀어야지. 만년필을 손에 쥐고 물결도 그어보고 종합장에 달린 스프링 모양처럼 선을 그어보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준비 운동에 들어간다. 그냥 되는 대로 쓰고 싶지 않아서. 그냥 펜이 굴러가는 대로 놔두고 싶지 않아서. 가지런히 단정한 모양새로 글씨를 쓰고 싶어서다. 이렇게까지 예열하는 이유, 그 시작은 연말 무렵 선물 받은 과슈물감으로 그린 그림엽서 때문이다.
사물 중에는 그저 보기만 해도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기념품이나 일기장처럼, 때에 따라 크기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엽서 또한 그런 힘센 사물이 아닐까.
_ <소설가의 사물> 조경란, 마음산책(2018)
꽤 도톰한 재질에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그림엽서는 은은하게 빛을 머금은 트레이싱 지에 폭 감겨 있어 내밀한 감성이 느껴진다. 감춰진 풍경이 궁금해 빛을 거둬내듯 트레이싱지를 열어 보이니 모노톤의 손글씨가 반갑게 인사한다. ‘at home’이라고 쓰인 글의 첫인상부터 마음이 포근해진다. 엽서의 종이 질감을 처음 느꼈을 때부터, 만년필을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다른 어느 펜보다 만년필 펜촉이 스칠 때의 촉감과 사각거리는 소리, 잉크의 스며듬이 가장 조화로울 테니까. 새해를 맞이하는 새 마음가짐으로 가족들에게 전하는 글을 담아야겠다 생각했다. 사색에 빠지기 좋은, 자그맣지만 평소에는 내색할 수 없던 커다란 마음을 담을 수 있는 크기의 엽서, 그리고 만년필. 이 둘은 연말 연초에 가장 어울리는 조합이 아닐까.
매일 출근의 고단함을 힘겹게 의식적으로 이겨내고 충실히 하루하루를 보낸 남편에겐 커다란 나무 한 그루와 단아한 정취가 느껴지는 집 그림을. 유년기의 지평선 너머 미지의 세계를 향해 매일같이 내면의 소란함과 다투고 있는 사춘기 큰아들에겐 세 살 아가의 발과 레고 장난감 그림을.(넌 나의 영원한 첫! 정! 이니까!) 그리고 꽉 들어찬 열한 살의 나날들을 보내며 점점 나의 키를 따라오고 있는 둘째 아들에게는 뭘 해도 사랑스러운 막내 특권을 상징하는 레터링을 담은 그림을 골랐다. 세 남자가 곤히 잠든 겨울밤, 편지를 쓰기에 밤은 깊고 동이 트기까지는 먼 새벽 두 시가 딱 좋지. 참으로 오랜만이지만 혹여나 잉크가 번질까, 글자를 잘못 쓸까 괜한 염려를 다독여가며 만년필 펜촉이 가야 할 길을 스스럼없이 나아간다. 마음에 온정을 담아 사각사각….
메라키(μεράκι)
어떤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깊이 녹아 들어가 진심과 영혼을 쏟아붓는 상태. 무슨 일이든 메라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사랑을 담아 누군가를 위해서 커피를 내리는 일. 우리는 이런 작은 일상에도 온 정성을 다하곤 한다.
_ 그림책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중에서
마리야 이바시키나 | 김지은 역, 책읽는곰(2022)
홀로 깨어 있는 적적함을 채워주길 기대하며 틀어놓은 음악 소리도 저 멀리 아득하게 흩어지고 글자만이 적요한 침묵의 공간에 꽉 들어찬다. 평소의 잔소리나 투정, 빈말이 아닌 정말 고심해서 쓰는 이야기. 10센티 정사각형 크기의 엽서 안에 모여지는 생각과 글자들. 어쩌면 지금의 순간이 그림책에서 마주한 ‘메라키(μεράκι)’일까. 흠뻑 빠져 있는 줄도 모르고 마음과 영혼을 다 내어놓는 일 말이다. 과슈 그림엽서 선물을 받는 순간부터 그려왔던 이 장면이 내게는 그날의 메라키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엽서를 받는 이로부터의 응답을 기대하지만, 나의 내면을 통과한 언어가 수신자에게 가닿는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감사한 일임을 알기에 그 욕심은 접어두기로 한다. 그래도 언젠가 가까운 내일에 내가 수신자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에세이 <소설가의 사물>
조경란
마음산책(2018)
그림책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마리야 이바시키나
김지은 옮김, 책읽는곰(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