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짙은 갈색의 시간

시린 겨울을 뚫고 [봄은 또 오고]

by greensian


소스라치듯 참으로 쌀쌀한 겨울바람이 분다. 한낮의하늘은 먹먹한 먹색이다. 세상 아름다운 알록달록 총천연빛을 큰 입으로 꿀꺽 삼켜버리고는 무심한 듯 물을 많이 머금은 단 하나의 무채색인 먹색. 먹빛 하늘색을 뚫고 희끗희끗 싸락눈이라도 날리면 좋으련만. 한밤중이면 은빛, 오렌지빛으로 총총히 밝힌 거리의 트리 불빛이라도 볼 텐데. 어쩐지 헛헛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오늘은 요양원에 계신 외할머니와 오스트리아에서 온 외삼촌과 조카들을 만나는 날이다. 연말에 들어오신 막내 외삼촌은 온 가족과 지인을 만나는 약속 미션을 완수했다. 강원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며 ‘도장 깨기’ 하듯 숨 가쁘게 열흘이 훌쩍 지나가고, 출국 전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모이는 자리. 외할머니가 아직 오시지 않아 밖으로 나가 보았다. 요양보호사 일을 하며 외할머니를 돌보는 이모는 할머니가 낙상사고로 거동이 불편하니 휠체어에서 차로 옮겨 타는 일이 더 힘에 부친다고, 가까운 식당으로 직접 모시고 오겠다고 했다.


저 멀리 휠체어를 힘차게 밀고 씩씩한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이모가 보인다. 털모자에 목도리, 하얀 마스크, 포근한 극세사 담요에 꽁꽁 싸여 휠체어에 앉아 있는 외할머니도 점점 더 가까워진다. 하이얀 속눈썹 아래로 눈 밑까지 살짝 덮인 보라색 털모자를 쓴 모습으로. 엄마(이모) 말 잘 듣는 순한 아기가 여기 있었네. 띵! 무채색 하늘빛 배경 화면을 뒤로 갑자기 상큼하게 등장한 보랏빛 덕분에 흑백 영화가 컬러 톤으로 바뀌며 ‘그대로 멈춰라!’ 정지화면이 되었다.



아스라이 깜빡이는 기억의 빛을 품고 아이처럼 어려진 외할머니.

노모를 바퀴가 달린 의자에 모시고 성큼성큼 지금을힘차게 내달리던 이모.

스무 살, 창창한 청춘의 몸 하나로 먼 이국땅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입지를 굳힌 막내 외삼촌.

어느덧 훌쩍 자라 날개를 펼치고 창공을 가르며 20대를 찬란하게 비상 중인 비엔나 조카들.

옷장에서 제일 예쁜 무지갯빛 니트를 꺼내 입고 영상통화로 쫑알쫑알 지저귀던 강릉 어린 조카들.

급성장기 궤도에 오르며 나날이 자라나는 내 아이들과 날마다 너울성 파도를 타며 생의 바다를 항해 중인 우리 부부.


고흥 앞바다 반지락(‘바지락’을 뜻하는 전남 방언)을손으로 캐고 굴 껍데기를 까며 당신이 일궈낸 크나큰 삶과, 그 삶이 빚어낸 소중한 소우주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운 우주를 품고 당신의 뒤를 잇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언젠가는 끝이 올 이 깊고 짙은 갈색의 시간, 어두운 겨울 차가운 공기를 뚫고 샛노란 표지에 아기 그림이 그려진 그림책 [봄은 또 오고] 한 권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다 클로즈업된다. 켜켜이 쌓이는 시간의 흐름 속에 마음의 창을 내고 저장된 저마다의 추억 몇 조각들. 겹겹이 포개어지는 ‘내 강아지! 내 사람들’의 아름다운 얼굴들. 외할머니는 자신의 피붙이를 만날 때면 꼭 끌어안고 따스하고 보드라운 손을 포개고 말씀하셨다.


워머, 내 강아지! 워머! 내 사람들아...!


세상 제일 구수하고 따숩고 정겨운 한 마디가 아련하게 스친다.


p.s

지금 나의 뇌리는 보라색 털모자를 쓴 할머니의 모습은 정지화면 그대로 두고, 단 하나의 영상만이 무한 재생되는 중이다. 휠체어에 노모를 모시고 세상 밖으로 성큼성큼 내달리던 이모의 생생한 그 움직임 말이다.




그림책 [봄은 또 오고]

아드리앵 파를라주

이경혜 옮김, 봄볕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