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돌봄’의 얼굴들

곁에 있어주기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by greensian


모피 재봉 기술자로 30여 년을 일한 그녀는 코로나 시절, 회사로부터 갑작스러운 사업장 변경 소식을 접한다. 낯선 출근지는 업무 환경을 제대로 갖춰놓지 않은 빈터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해고 통보나 다름없었다. 한겨울 맹위를 떨치는 동장군의 기세를 뚫고, 그녀는 부당한 처우를 받은 동료들과 노조 깃발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 뉴스에서나 봤던 냉혹한 시위 현장에 피켓을 들고 나선 건 평생 처음이다. 호락호락한 인생은 없다. 살아내기 위한 투쟁의 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함과 간절함, 그리고 비장함. 하루아침에 직원을 낭떠러지로 몰아낸 회사에 대한 배신감만큼 더 큰 충격은 없었으리라.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며 인생 제2막을 열었다. 젊은 시절, 성당 레지오 단원으로 봉사활동을 했던 전력이 직업을 선택한 이음줄이 되어 주었다. 10년 넘게 베테랑으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큰 언니의 조언도 영향이 컸다. 무릎 수술에 이어 몸이 불편해지고 자주 깜빡깜빡하는 노모가 고향에서 올라와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그녀는 취업하면 직접 어머니를 돌보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향해 앞만 바라봤다.


그녀는 나의 이모다. 30년 직장생활을 하며 식구들을 뒷바라지한 이모는 지금 외할머니를 돌본다. 집 가까운 요양원에 취업해서 직접 모시고 있다. “어르신들이 얼마나 아기 같은 줄 몰라. 참 예뻐.” 언젠가 이모의 말을 듣고 천직이란 게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외할머니의 사물함이며 이불, 베갯잇은 특별하다. 요양원에서 제공된 기성품이 아니라, 이모가 직접 품을 들여 공수해서 그렇다. 할머니 빨랫감도 시설 세탁을 이용하지 않고 꼭 집으로 가져와서 빨고 뽀송하게 말려서 가져간다.


아스라이 저 먼 곳에 기억을 놓고 아이가 된 엄마를 시설과 서비스를 갖춘 환경에서 손수 돌볼 수 있게 된 일. 이모는 꿈같던 하나의 목표를 이룬 것일까. 분명한 건, 혹독한 시위 현장에 처음 발을 내디딘 그날만큼 두렵고 무섭고 외로운 결심이었을 것이다. 뒤를 돌아봐야 돌아갈 곳도 없고, 플랜 B도 없었을 테니 처절하고 고독한 싸움 끝에 내린 최후의 선택. 눈물과 슬픔으로 쓰인 꿈이라 유독 마음이 아프고 아려 온다. 그래도 직장에서 함께 하는 동료와 고생을 분담할 수 있으니 조금은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할머니는 어제도 오늘도 꿈에서 굴을 까고, 반지락(바지락)을 캐러 개펄에 나갔다 들어왔다고 말했다. 자신을 돌보는 딸의 이름은 잊었지만, 다시 알려줘도 몇 초 만에 이름이 뭐냐고 또 묻고, 알려준 대로 이름을 읊어보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젊고 어린 시절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진다.


나는 어머니가 뜯어지는 책 같다고 생각했다.
책장이 날아가고, 문단이 뭉개지고, 단어가 흘러내려 흩어지고, 종이는 순수한 흰색으로 되돌아간다. 가까운 기억이 먼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은 더해지지는 않는, 뒤에서부터 지워지는 책. 어머니의 말에서 단어가 사라지기 시작하며, 텅 빈자리만 남았다.

_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p.24중에서


할머니를 뵈러 갈 때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손을 맞잡는 것이 전부다. 할머니 입술에서 나온 내 이름은 허공에 흩어지고 곧 자취를 감춰버리지만, 그 온기만큼은 온몸으로 가득 채워지니 말이다. 이모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난 너무 어리석다. 아직은 다가오지 않은, 가까운 미래가 제발 가까워지지 말아 달라고, 아프지 말고, 오래 건강하시라고,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마음으로 기도만 주절거릴 뿐이다.





피붙이도, 친인척도, 친구도 아니지만 낯설면서도 생경한 모습의 또 다른 ‘돌봄’을 마주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이웃’이라는 이유로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삶을 살아가고 싶지만, 본의 아니게 눈길이 가고 측은지심이 드는 사람의 이야기. 영국 내음 물씬 풍기는 영화 [레이디 인 더 밴(Lady in the Van)]은 극작가 앨런 베넷(알렉스 제닝스 연기)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970년 런던 캠든 타운 주택가에 밴을 주차하고 살아가는 노숙자 셰퍼드 부인(해리포터의 맥고나걸 교수님, 매기 스미스 연기)이 그 주인공이다. 부인은 이 집 앞, 저 집 앞, 내키는 대로 주차를 하고, 주민들에게 꼬장꼬장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린다. 어른이고 아이 할 것 없이 이웃의 호의는 내치고 까다롭고 별나게 구는 인물이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냄새나고 더럽고, 불편한 방해꾼이 되는 그녀를 이웃들은 내쫓지 않고 오며 가며 안부를 묻고 살핀다. 그러던 어느 날, 주차 제한 구역이 설정되면서 셰퍼드 부인에게 강제로 퇴거 명령이 내려진다. 다른 주민들보다 그녀를 조금 더 관심 있게 지켜보고, 부인이 화장실이 급할 때도 구세주가 되어 준 앨런은 결국, 자신의 집 주차장을 허락한다. 그런 결정은 그의 진심인가, 아니면 작가적인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렇게 셰퍼드 부인은 앨런 집 주차장에 밴을 대고 전기도 빌려 쓰며 삶을 꾸려가는데.


정작 몸이 불편해진 자신의 어머니는 요양원에 모시고, 자신의 앞마당을 노숙자에게 내어준 앨런. 본인 스스로 ‘작가는 이중적이다. 글 쓰는 자아와 삶을 살아가는 자아는 따로 있다’며 자신을 정의하는 앨런은 셰퍼드 부인을 관찰하며 그녀를 도울까 말까, 그녀의 삶에 개입할까 말까를 고민하며 상충하는 두 개의 자아를 마주하며 극작업을 이어나간다. 그는 창 너머로 부인의 생활을 관찰하고, 가끔 휠체어를 밀어주고, 자신과 같은 머그잔에 커피를 내려주기도 한다. 가끔은 정원 앞마당 곳곳 여기저기, 그리고 자신의 신발에 묻은 그녀의 배설물을 치우며 불만스러운 한숨을 짓다가도 체념한다. 직접 먹여주고 재워주는 건 아니지만, 그는 자기 방식대로의 돌봄을 묵묵하게 실천한다.


“난 다른 사람 돌보는 걸 싫어해요. 생각조차 하기 싫고 그 단어도 싫어요. 난 상관 안 한다고요. 난 여기 있고 할머니는 저기 있어요. 도움은 괜찮지만, 전문가랍시고 3개월에 한 번 나타나서 내가 15년간 알아 온 사람에 대해 설명하려 하는 건 정말 못마땅해요”

영화 [레이디 인 더 밴(Lady in the Van)]
_극작가 앨런의 대사 중에서


3개월마다 현장 점검하러 나온 복지사에게 이렇게 대차게 말할 때도 있지만, 앨런은 부인을 가장 근거리에서 오래 관찰한 자로서 셰퍼드 부인의 ‘믿는 구석’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니 부인이 기력이 쇠약해져 복지센터로 들어갈 때, 필요할 때 쓰라며 자신의 친인척 정보가 담긴 쪽지를 그에게 건넸겠지.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믿을만한 지인은 바로 앨런이니까. 그는 부인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많이 관찰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부인의 마지막을 가장 먼저 보지는 못했다.


“3개월 있을 생각으로 집 앞에 차를 들여놨다가
15년을 살았네요.”

영화 [레이디 인 더 밴(Lady in the Van)]
_셰퍼드 부인의 대사 중에서


고맙다, 감사하다 절대 말하지 않는 셰퍼드 부인의 화법상, 이 말은 ‘오랫동안 나를 품어줘서 고마웠어요’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셰퍼드 부인은 영화의 모든 신 중에서 가장 밝고 가볍고 유쾌하게 웃으며 하늘로 승천하고, 그녀의 생은 앨런의 작품으로 탄생한다. 영화 끄트머리에 나오는 앨런의 독백은 그래서 더 의미가 깊다. 오랜 세월이 입증하는 존재의 깊은 가치와 자신의 삶을 정의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 문밖에 있던 그녀는 범법자였다. 진한 삶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진부한 삶 곁에 그녀의 삶이 있었다니. 처음엔 우연히 내 인생에 끼어들었던 불청객이었던 그녀는 내 삶의 주변에 정말 오래 머무르면서 우연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그녀를 받아들이고, 그녀를 도우면서 어느새 내 삶도 20년이나 흘러갔다. 밴에 얽힌 그녀의 삶은 다른 이들이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타고니아 여정에 관해 쓸 때, 나에게 그녀의 삶을 기록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영화 [레이디 인 더 밴(Lady in the Van)]
_ 극작가 앨런의 마지막 독백



돌봄의 서로 다른 얼굴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관심과, 시간과, 애정, 때론 미움과 후회, 슬픔, 고통, 그리고 그 밖에 존재하는 전부를 사랑이라는 커다란 그릇에 담아서 내어 준 것으로 여겼지만, 그 여정의 끝에는 형언할 수 없는 또 다른 형태로 채워지는 무언가로 돌아온다는 것. 눈을 마주 보고 같이 있어 주기로 한 것부터 값진 일이다.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거니까.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반비(2016)


영화 [레이디 인 더 밴 Lady in the Van]

각본 : 앨런 베넷

감독 : 니컬러스 하이트너

출연 : 매기 스미스(셰퍼드 부인 역)

알렉스 제닝스(앨런 베넷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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