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시며드는’ 나날들과 함께
어느 날 스치듯 마주친 시 한 구절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무엇인가가 샘솟을 때가 있다. 그 무언가는 대개 표현하지 못해서 ‘말할 수 없음’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 내면에 존재하는 수백, 수천 가지 이상의 촉수 중에 어느 하나와 맞닿아 통하는 순간이랄까. 적확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나의 부족한 언어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마음속에 그저 응어리져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시인의 입술을 통해 글로, 시구로, 시어로 빚어진 언어와 뜻밖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찌르르- 하고 불꽃이 튀곤 한다.
나팔꽃은 시름시름 앓다가도 동이 트면 훌훌 털어버린다.
후회란 원래 그런 졸속이다 괜히 피었다 싶다가도 피기 전으로 돌아가려 하다가도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 싶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나팔꽃은 뻥 뚫린 목구멍으로 자기 몫인 햇살을 받아 삼킨다. _ 이윤학 [그림자를 마신다] ‘나팔꽃’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308, 2005)
‘나팔꽃은 뻥 뚫린 목구멍으로 자기 몫인 햇살을 받아 삼킨다’. 이 시구를 보자마자 꽃이 활짝 피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태양과 마주하고, 다시 잎끝이 저물때조차도 환한 빛의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던 나팔꽃이 떠올랐다.
어느 해 늦여름쯤이던가. 나팔꽃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싹을 텄나 모르게 변변한 지지대 하나 없이 아파트 단지 안에 심어진 향나무에 기대어 넝쿨을 뻗었다. 넝쿨은 곳곳에 초록 꽃망울을 품고 있었고, 나선형으로 빙그르르 회전하며 어제보다 한 뼘 더 자라 있었다. 아침마다 만난 나팔꽃은 매일 다른 모습이었다. 어제 아침에 만개했던 꽃잎이 오늘 아침엔 끄트머리가 말려 있고, 어젠 앙증맞게 달려 있던 꽃망울이 오늘은 조금 부풀어 있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열린 꽃잎은 아침나절에 만개해 오후가 되면 꽃잎을 다시 오므리는 하루살이꽃이니까. (내가 본 나팔꽃은 야생종 나팔꽃이다. 나팔꽃과 비슷한 ‘메꽃’은 때를 가리지 않고 꽃이 피고, 밤에 피는 나팔꽃 종류도 있다)
매일같이 시차를 두고 각기 다른 꽃망울이 제 속도대로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데, 내가 마주한 그 순간만큼은 꽃의 생애를 점으로 콕 찍어서 꽃의 과거와 현재, 미래 시제가 공존하는 스틸 화면이 되었다. 어제의 꽃은 안녕을 고하고, 오늘의 꽃은 오후 들어 꽃잎을 말고서 안녕을 준비하고, 내일의 꽃은 또 새롭게 피어날 기대를 한다. 하루라는 시간 동안 꽃은 인내한 만큼 자신의 몫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어제의 후회 따위는 훌훌 털고 동이 트면 새로운 빛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당시 산책길을 오며 가며 나팔꽃을 사진으로만 저장하다가 어느 날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꽃망울을 감싸고 촘촘히 자라나 있는 솜털과 소프트콘 아이스크림 모양의 꽃망울과 신비로운 자줏빛, 조금 뒤면 벌어질 준비를 하고 오밀조밀 정교한 프릴을 부풀리는 꽃봉오리, 진갈색과 짙은 녹빛을 품고 우아하게 날개를 편 꽃받침, 작지만 단단한 열매처럼 야무진 초록 꽃망울, 부드럽고 유연한 나뭇잎, 끝이 말려 들어간 꽃잎의 아름다운 주름, 또렷하면서도 오묘한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암술…. 보면 볼수록 새롭고, 어제는 보지 못한 미지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었다.
나팔꽃이 머금고 있는 빛의 세계를 보고 있노라면 얼이 빠진 듯 멍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우주에 블랙홀이 있다면, 나팔꽃엔 오묘한 ‘빛멍’의 세계가 있달까. ‘뻥 뚫린 목구멍으로 자기 몫의 햇살을 받아 삼킨다’라니. 너무 멋진 표현 아닌가. 꽃이라는 하나의 세계가 열리기까지 공들인 시간, 절정을 향해 오르다 이내 저물어가는 때에도 한 치의 빈틈없이 꿋꿋하게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는 꽃에 매일 감탄할 수밖에.
너의 하나의 위대한 경험도 어둠에서 빛나는 공간들을
펼친다 그곳에 빛의 씨를 보관한다
_울라브하우게 [어린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어둠에서 빛나는 공간’ 중에서
내가 아침에 만난, 꽃봉오리가 열린 꽃은 깜깜한 새벽 서너 시경부터 아침의 해를 만나기까지 그 시간을 인내했을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혼자서 꿋꿋하게 어둠 속에서도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 그러니 꽃잎을 접을 무렵에도 선명한 빛의 씨를 잃지 않고 품고 있었던 거겠지. 자연에 몸을 맡긴 식물은 그저 경이롭고 신비로울 뿐이다.
‘만희네 집은 동네에서 나무와 꽃이 가장 많은 집입니다’라는 글로 시작하는, 우리 그림책의 고전, 권윤덕 작가의 [만희네 집](길벗어린이, 1995)은 책을 펼치자마자 보이는 면지부터 자세히 봐야 한다. 서사가 시작되고 끝나는 앞뒤 면지를 보면 나팔꽃이 그득하다. 온통 보라색 면지에 빽빽하게 들어찬 나팔꽃을 마주하고 어찌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꽃이 비슷하게 그려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같은 줄기에도 각자의 시간이 다 다른 꽃의 세계가 있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인다. 이야기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기능을 하는 이 장치는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의 큰 축에 놓고 설정한 권윤덕 작가님의 세계관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만일 사람이 저토록 흔들림 없는 순수한 추진력에 이끌려 한눈팔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온 존재로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을 가지고 꽃을 피울 수 있다면, 불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꽃을 불완전한 것조차 감추지 않는 꽃을.
_ 드니스 레버토프, ‘꽃 피우는 직업’ [시를 납치하다, 류시화] P.147 중에서
불완전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불완전한 것조차 감추지 않는 꽃이라니. 그래서 ‘피우는 것’이 직업인 꽃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산책길을 걷는 행인에 불과했음에도 내밀하고도 신묘한 나팔꽃의 세계를 잠시나마 들여다볼 기회를 준 꽃에 고마움이 크다. 묵묵히 나팔꽃의 넝쿨을 너그러이 받아 준 향나무도 물론.
그저 머리를 비우고, 그저 무용한 아름다움에 탐닉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완전하든 그렇지 않든,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며 묵묵히 있어 주는 자연과 식물은 언제 기대도 좋은 존재다. 시어의 세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시는 잘 모르지만, 좋은 시를 적극 추천해 주는 글방 선생님과, 함께 시를 읽는 동무들이 있어 전보다 시를 조금씩 곁에 두고 친해지려 노력 중이다. 도서관 시집 코너를 기웃거리다 마음에 드는 제목이 있으면 냉큼 집어 오기도 하고, 시인이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만날 때마다 놀라곤 한다. 시인이 자아내는 특유의 정서와 말과 글이 어렵기도 하지만 깊고 넓고 그윽해서 더 만나고 싶달까. 내 마음의 주파수가 닿는 시어를 마주할 때 특별한 느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시나브로 ‘시며드는’ 시간이 될 테니 앞으로도 조금씩 꾸준히 기대어 보는 걸로.
시집 [그림자를 마신다] ‘나팔꽃’
이윤학,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308 (2005)
그림책 [만희네 집]
권윤덕 지음, 길벗어린이(1995)
시 모음집 [시로 납치하다]
류시화, 더 숲(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