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사각사각 새하얀 고요의 세계로

지난밤 소오복이 내린 눈 길을 걸어요

by greensian

봄이 온다는 ‘입춘’이 엊그제였다. 엄마는 여느 해처럼 절에 가서 온 식구의 건강과 안녕, 행복을 비는 기도를 올리고 입춘 부적을 선물로 건네셨다. 여태 풀리지 않는 강추위를 뚫고 이른 아침부터 새해의 복을 가져다주신 엄마께 그저 감사할 뿐이다. 두 달간의 겨울방학 대장정 중 한 달이 무탈하게 지나갔음에 안도했던 찰나였다. 남은 한 달은 설 명절을 기점으로 시간의 화살처럼 저만치 앞서가고 있겠지. 입춘을 시작점으로 점차 시간의 가속도가 붙어 창을 열면 어느새 파릇한 봄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아이들이 게으름을 부리는 아침나절 잠깐이 지금의 겨울을 견디는 유일한 틈새다. 도서관은 핑계, 단골 카페에 들러 따뜻한 카페 라떼 한잔 사 오기는 필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서 걷는다는 것 자체가 의식의 흐름을 새로운 방향으로 깨는 ‘의식적인’ 행위다. 시간이 축 늘어져 있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거실에 축 늘어져, 바싹 마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젖은 빨랫감들을 뒤로 하고 나는 간다. 문밖으로.


보행은 가없이 넓은 도서관이다. 매번 길 위에 놓은 평범한 사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서관,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장소들의 기억을 매개하는 도서관인 동시에 표지판, 기념물 등이 베풀어주는 집단적 기억을 간직하는 도서관. 이렇게 볼 때 걷는 것은 여러 가지 풍경들과 말들 속을 통과하는 것이다.

[걷기예찬] _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김화영 옮김, 현대 문학(2002)


아파트 단지 가장자리 오솔길을 지나 공원을 통과하면 도서관에 가닿는데, 발을 내디디고 걷는 이 행위 자체가 ‘가없이 넓은 도서관’이라니. 감격스러운 표현이다. 번역가님은 또 이것을 ‘가없이’라고 옮길 생각을 했을까. 평범한 사물들과 풍경들이 꺼내놓는 이야기 속을 통과하는 것이 걷기라니. 걷다 보면 그저 지나치는 풍경에 내 눈과 마음을 맡긴다고만 여겼는데, 내가 깨어 있으면 있을수록 스치는 모든 것들이 살아 있는 영감의 대상이 된다. 어제와는 다른 공기와 냄새, 온도, 습기를 감지하며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는 가능성의 기회가 되면서도, 자연과 사물들의 고요한 소란을 적극 귀 기울이는 시간이기도 하니까.


오늘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밤새 함박눈이 곱게 내려서다. 고요한 소란을 하얗게 빛나게 하는, 각기 다른 육각형 눈의 결정들이 합류해서 산책길이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해졌다. 신비로운 눈송이의 깜짝 방문으로 이 ‘가없이 넓은 도서관’의 이야기는 또 얼마나 풍성해졌을까.


눈은 온갖 모서리를 지운다

악몽은 부드러워지고
비명은 둥그레진다

사진을 찍거나 발자국을 찍거나
사람들은 남기고 싶어 한다 뭐든

와 예쁘다 너무 예쁘지 너무 예뻐
슬픔의 정수리 위로 내리는 들뜬 소리

너무 예쁘지
이래서는 안 될 만큼

하얗고 둥근 고통은
모서리가 없어 심장을 찌르지 못한다.
같이 흘렸던 눈물을
끓는점까지 가지 못하고 식는다

‘하얗고 둥근 고통’
송정원 창비 시선 520
<반대편에서 만나> (창비, 2025) 중에서


이 불규칙한 작은 얼음덩어리가 신비로운 것은 같은 모양이 한 개도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육각형의 결정체는 미국 사진작가 윌슨 벤틀리의 기록 덕분이다. 어릴 적부터 자연 관찰이 취미던 벤틀리는 현미경을 선물로 받고 물방울을 관찰하다가 눈송이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당시 고가의 현미경 대물렌즈를 부모님을 설득해 구입하고 눈송이를 촬영하기 시작해서 열아홉의 나이에 첫 결정체 사진을 찍었다. 그 후 평생에 걸쳐 눈 결정체를 연구하며 5천 장이 넘는 눈송이를 사진으로 남겼다.


눈 결정은 기본적으로 육각 구조이지만 형태는 별, 나뭇가지, 바늘 모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습도가 높을수록 구조가 더 정교하게 성장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기에 더 신묘한 수수께끼다. 신비한 눈송이들로 온 세상이 적막한 고요함에 빠져든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잠재우는 새하얀 이불 포근하게 덮고 모든 풍경과 사물들이 소곤소곤 어떤 얘기를 나눌까 자못 궁금해진다.


깜깜한 새벽 펄펄 내리는 눈을 보고 잠들었다 알람도 없이 눈이 떠졌다. 목도리 휘휘 감고 패딩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새하얀 고요가 전부인 세상으로 나간다. 아담한 오솔길에 쌓인 눈이 소담하니 예쁘다. 싸르륵싸르륵 눈을 쓸고 지나간 자리마저도 따스한 온기가 감돈다.



어느 겨울날이었어.
공기에 얼음 결정이 가득하고
나무 타는 냄새가 났어
우리는 겨울 들어 처음으로
크고 폭신한 누비옷을 꺼내 입었지.

(...)
저녁이 되면 눈 냄새가 나.
곧 겨울이 다시 오겠지
나는 계속 밖에 있을 거야
누군가 나를 부를 때까지

[저녁이면 눈 냄새가 난다]
사라 스트리츠베리 글,
사라 룬드베리 그림, 안미란 역, 위고(2005)



공원을 통과할 무렵 왼편으로 붉은빛이 나무숲 사이로 바스락거린다. 동이 트는 중이다. 저 멀리 야트막한 언덕에서 눈썰매를 타고 깔깔거리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선연하게 들린다. 소복하게 쌓인 눈 담요 위로 등을 대고 누워 천사가 날갯짓하듯 팔과 다리를 파닥거리며 스노우엔젤을 그리던 날들 또한 스쳐 지나간다. 홀로 눈발자국을 남긴 이 아득한 고요의 세계에 소리 없이 동참해 준 건 바로 밤새 누군가 빚어 놓은 눈 오리 군단이다. 언제부터 이곳에 앉아 공원의 설경을 직관하고 있었을까. 오늘의 해는 저만치 떠오르고 있으니,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네. 있잖아. 눈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름답고 영롱한 눈송이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겹겹이 옷을 지어 집은 너희들. 설경 속에 우뚝 서 반짝이던 모습 내가 기억할게.







산문집 <걷기 예찬>

다비드 르 브르통

김화영 옮김, 현대 문학(2002)


창비 시선 520 <반대편에서 만나>

송정원(창비 2025)


그림책 [저녁이면 눈 냄새가 난다]

사라 스트리츠베리 글, 사라 룬드베리 그림

안미란 역, 위고(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