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읽기’, 무해하고 순수한 낭독의 묘미

잠깐, 귀로 ‘듣기’ 가 아니라 ‘읽기’라고요?

by greensian


콘텐츠가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우리는 스마트폰 터치 한 번이면 전 세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콘텐츠를 경험할 수 있다. 짧은 동영상에 단 몇 초라도 붙들리면 강력한 알고리즘의 유혹으로 현실 밖으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검색을 위한 의지 따위는 저 멀리 사라지고, 스크롤을 올리는 무의식적인 행위만이 남는다. 그렇게 소모해 버린 시간이 얼마인지 알게 되면 그것만큼 당황스럽고 허무한 순간도 없다. 남아있는 지식은커녕 무엇을 봤는지 기억조차 없다. 그저 빠른 속도로 휘발되어 사라지고 없을 뿐.


어른들도 이러한데, 아무리 스크린 타임을 걸고 부모의 관리하에 있다고 해도 아이들은 어떨까. 아이들은 쇼츠, 각종 리뷰 콘텐츠, 영상에 더 쉽게 현혹될 수밖에 없는 데다 도파민의 굴레에 빠져 더 자극적인 영상에 빠져들게 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우리는 지금 ‘팝콘 브레인’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미국 워싱턴대 정보대학원 데이비드 레비(David Levy) 교수가 창안한 용어로, 강렬한 자극에만 뇌가 반응하는 현상을 말한다. 숏폼과 같은 짧은 영상으로 집중력을 도둑맞는 사이 우리의 뇌는 점점 둔해진다. 실제로 숏폼을 보는 동안 뇌파를 관찰하면 생각하고, 기억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전두엽의 활성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디지털 시대에 점점 퇴화하는 뇌를 깨우고 점차 활성화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뇌를 깨우는 독서에 답이 있다

뇌과학 연구자 가와시마 류타는 <독서의 뇌과학>에서 독서를 하면 뇌를 활성화하는 실제적인 효과를 입증하며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책 읽기를 권한다. “독서를 할 때 뇌는 왼쪽과 오른쪽 모두 분명히 활동”하며 “활자를 읽으면 뇌의 거의 전 영역이 활성화”되어 뇌의 전신운동과 같다고 했다. 또한 그는 눈으로만 읽는 ‘묵독’을 넘어 소리 내어 읽는 ‘음독’의 효과에 주목한다.


묵독은 눈으로 문자를 보고 그 내용을 뇌의 기억을 저장고에 일시적으로 담으며 의미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반면 음독은 눈으로 본 문자를 입으로 말해야 하므로 단순히 문자를 볼 뿐만 아니라 이를 소리로 내기 위한 변환 작업도 거쳐야 한다. 또한 눈으로 본 문자의 정보를 소리 내어 말하는 과정에서 그 정보를 다시 귀로 들을 수도 있다. 정보의 내용은 같아도 뇌의 관점에서 보면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 입과 목을 움직일 때 사용하는 정보, 소리가 되어 다시 귀에 들어오는 정보가 있으니 뇌를 다각도로 자극하는 셈이다. 책을 읽는 것을 넘어, 소리 내어 읽음으로써 우리는 뇌의 여러 영역을 동시에 자극하고 발달시킬 수 있다.

_[독서의 뇌과학] 가와시마 류타, p.86-88


귀로 읽기

잠깐만요, 귀로 ‘듣기’가 아니라 ‘읽기’라고요?


작년에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에게 김다노 작가의 <최악의 최애>라는 동화책을 읽어주는 활동를 했다. ‘동화동무씨동무’라는 동화책 읽어주기에 앞서 주 1회, 10분간 그림책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친해지고 나서(리딩맘 활동) 네 번에 걸쳐 한 권의 동화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아이들의 사랑과 감정을 그린 어린이계의 로맨스로 통하는 책으로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이 책이 선정되었는데, 아이들은 책에 수록된 다섯 편의 단편을 영상이나 효과음 하나 없이 오로지 리딩맘의 목소리에 의지해서 들었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오디오북’을 교실에서 경험한 셈인데, 실제로 귀로 ‘듣는’ 활동을 넘어서서 귀로 ‘읽기’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책을 읽고 들으며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감상하고 독해하는 주체가 어린이 자신이기에 귀로 하는 ‘독서’가 가능했다.


김다노작가의 [최악의 최애]. 아이들의 선호도 투표결과 선정된 책

(* 본래 ‘동화동무씨동무’는 어린이도서연구회가 학교, 도서관 등과 함께 운영하는 ‘책 읽는 어린이 모임’을 뜻하며 국내 창작 동화 중 선정된 책을 초등 3~6학년 어린이들과 함께 읽는 활동이다. 지난해,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학교 실정에 맞게 6학년 3개 반을 대상으로 수업 시간 4차시를 편성하여 처음 운영한 바 있다)



“재미있고 좋았어요. 도파민이 터질 것 같다가 그렇지 않아서 이야기가 아쉬웠어요.


<최악의 최애> 총 다섯 편의 단편 중, 표제작인 ‘무지와 미지, 봄’을 읽어주고 나서 한 어린이가 남긴 인상적인 한 줄 평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뭔가 쾌감을 느낄만한 기막힌 결말을 기대했다는 것이 느껴지는 감상평이자 아쉬움을 전하는 어린이 독자의 정확한 분석이다. 정작 정신이 쭈뼛 선 것은 나 자신이었다. ‘도파민’ 키워드를 듣고, 내가 좀 더 재미있고 생생하게, 흡입력 있고 감정 연기 확실한 배우나 성우처럼 읽어줬다면 조금 달라졌을까 싶어서다. 내가, 성우처럼? 상상이라도 너무 높은 ‘넘사벽’ 기준을 세운 것이 맞다. 책 읽기를 준비할 즈음 김금희 작가의 <첫 여름, 완주>라는 듣는 소설을 오디오북으로 접하며 너무 깊이 빠져든 탓도 있었을 터.


구덩이 속에 있으니 열매는 전보다 더 또렷하게 냄새와 소리를 느꼈다. 원래 밤의 숲이 품고 있던 – 여름 여치들의 청아한 음색과 가지와 가지를 옮겨 가는 밤새들의 날갯짓과 여린 가지를 오르르 들추다 내려와 열매 귀를 먹먹하게 하는 골짜기 바람 – 외에도,


달을 비추기 위해 기꺼이 더 어두워진 연못의 물결 소리.
뾰족한 전나무 잎들이 공기 중에 긋는 투명한 빗금 소리.
흙 알갱이를 짚으며 땅벌레들이 길을 찾는 소리.
부후된 통나무 껍질을 쪼개며 버섯이 피는 소리. 이불이 펼쳐지듯 밤안개가 너르게 이동하는 소리.그러다 어저귀와 열매 위로 내려앉는 소리.
그렇게 밤이 존재하는 소리.

_ 김금희 <첫 여름, 완주> p.155중에서


밤의 숲,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 비와 흙, 나무의 향이 뒤섞여 나는 특유의 내음과 새와 나뭇잎, 가지들의 미세한 움직임에서 나오는 여리고 섬세한 소리, 주목하고 집중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그 순간의 잔향과 눈앞에서 실제로 펼쳐지는 듯한 광경. 그리고 다채로운 자극으로 모든 오감이 활짝 열려 ‘듣는 소설’의 매력에 빠진, 생경하면서도 감동적인 충격이 너무도 신선했다. 그러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내 목소리가 성우처럼은 아니더라도 흡입력 있게 아이들에게 다가간다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너무 큰 기대와 목표를 세웠는지도 모른다. 아닌 척은 했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의 반응이 어떨지, 지루해하지 않을지, 졸거나 엎드려 있진 않을지 속으로는 엄청나게 떨고 있던 나였다.


그림과 글이 함께 있는 그림책도 아니고, 이야기마다 캐릭터가 등장하는 호흡이 긴 동화책을 교실에서 읽어준 경험은 생전 처음 있는 일이다. 아이들 어린 시절 집에서 잠자리 독서로 읽어줄 때와는 다른 환경과 조건에서 온전히 내게 할애된 40분이라는 시간(그것도 네 번씩이나!)은 부담스럽기도 하거니와 학교나 아이들에게나 귀한 수업 시간을 허락받아 기획된 자리인 만큼 긴장과 떨림은 피해갈 수 없었다. 책 읽어주기를 준비하며 여러 번 녹음해 가면서 발음과 속도, 시간을 점검했지만,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큰 시도였다.


첫 시간, 녹음한 음성 메모를 들으며 진땀 빼며 지나간 40분을 복기했다. 교실 맨 뒷자리까지 잘 들리도록 목청을 키우고 톤을 한껏 높여 문장을 읊는 나의 목소리. 초반 5분은 호흡이 가빠지고 대사 톤도 들쑥날쑥 어색하게 이어져 들으면 들을수록 얼굴이 달아오르고 온몸의 세포가 삐쭉 곤두섰다. 잘해보려 기를 쓰는 아마추어 낭독가의 애씀의 민낯은 나만 알 수 있는 신호였다. 초반을 넘어가자 아이들의 반응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탄식하고, 책 속 인물처럼 휘파람도 휘휘 불고, 혼잣말도 해 보고, 그들만의 언어로 비유도 척척 쏟아냈다. 이야기를 함께 들으며 ‘훗 훗’ 반응을 보이시며 미소를 짓던 담임 선생님 표정도 뒤늦게 떠올랐다. 내가 처음부터 ‘성우 같은 목소리와 호흡’에 집착했다면 어쩌면 이야기 끝까지 당도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책을 읽어주겠다는 시도조차도 못 했을지도.


독서보다는 디지털 영상에 익숙한 아이들 앞에서 효과음도, 영상도, 어떤 장치도 없이 책을 읽어준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었다. 수업도 아니고, 별도의 독후활동도 없이 오로지 목소리에 이야기를 실어 전하는 무해하고 수수한 시간을 아이들이 잘 견뎌줄 수 있을까 우려와 고민도 많았지만, 쉼표와 온점 하나에도 숨을 얹을까 덜까 나도 모르게 낭독의 묘미에 빠져들었음을 고백한다. 걱정과는 정반대로 차분히 제 자리에서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건네주던 아이들이 너무 고맙다.


활동을 마치고 나서야 예전에 읽었던 소설 한 편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요양원 방 한 칸, 바닥부터 천장까지 사방의 벽을 3천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자기 방에서 홀로 식사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요양원 주방에서 이제 일을 막 시작하며 할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식사를 배달하는 청년이 등장했던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라는 소설이다.


청년 그레구아르는 학창 시절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한페이지도 넘기지 못했던 책에 질렸던 기억 때문이다. 그런 그가 배식을 담당하던 ‘책방 할아버지’에 점차 호기심이 생긴다.


나는 기회가 날 때마다 그의 방에 들른다. 일이 끝나면 녹초가 되지만 자기 방 안에 틀어박힌 책방 할아버지가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긴다. (...) 그는 아는 것이 아주 많고, 책으로 둘러싸인 인생을 살아왔으며, 끝도 없이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다. 나는 정확히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 책들 가운데에서 그 노인과 함께 무얼 하고 있는 걸까? (...) 그가 늘어놓은 책표지. 다른 무엇보다 나를 유혹할 만한 책제목. 그건 우리 사이의 게임이다. 나는 그에게 ‘책읽기요? 됐거든요’ 하는 태도를 보이는 척하고, 그는 털끝만큼도 나를 설득하려는 의도가 없는 척하기. (p. 23)


청년은 책을 안 읽는 하루는 헛되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반기를 들며 정작 책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시건방을 떤다. 할아버지는 이젠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었고 자신에게 남은 건 음악 뿐이라고 말을 건넨다. 그러고선 청년에게 글을 읽을 줄 아냐는 질문을 하지만 청년은 답이 없다. 이틀 후 그레구아르는 자신의 결정을 말한다.


“피키에 씨. 솔직히 책 읽기는 제 적성에 맞지 않아요. 제가 여기서 하는 일은.... 그래서 제 생각인데요. 제가 하루에 한 시간씩 피키에 씨에게 책을 읽어드리는 거예요. 엄청 좋은 생각 아닌가요!? 그러면 피키에 씨에게 도움이 되고, 저는 또 주방에서 한 시간 덜 있게 될 테니 저한테도 좋고요!”
내 어조는 의혹과 간청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를 기쁘게 해 주고 싶은 마음, 그건 분명하다. 계속 피하고 달아나려 했던 곳에 제 발로 찾아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노인은 이런 문제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p.27)


그렇게 자신의 결심으로 할아버지의 방에서 낭독을 시작한 그레구아르는 이후 요양원 내 할아버지의 이웃 할머니인 새로운 청중들이 생겨 정기적인 낭독회를 갖게 되고; 책방 할아버지의 진심어린 조언과 훈련을 받으며 진짜 낭독자로 성장해간다.


“네 목소리가 열에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전해진다면, 그걸로 이미 성공한 거야. 자신감을 갖고 당당해져! 너는 이제 더 이상 내 방에서 낭독하는 게 아니야. 너는 영화를 만들어내야 해. 네가 책을 읽을 때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장면들을 떠올리듯이. 그들 역시 귀로 듣는 장면들을 눈으로 보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낭독이 끝날 때면 눈이 뻐근해야 한다. 입을 크게 벌리고 또록또록하게 발음해! 넌 근육이 부족해! 운동선수처럼 근육을 키워야 한다! (p.117)


그레구아르는 낭독의 즐거움뿐 아니라 인물을 넘나드는 목소리의 변화를 느끼면서 이야기에서 전해지는 감동을 낭독회 멤버와 나누고 내면 아이를 위로하는 아주 작은 빛을 발견하며 낭독의 세계에 점차 스며든다. 소설은 정적이며 온통 적요한 공기가 내려앉은 요양원에 엄청난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재미난 에피소드도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자극적이고 점차 매운맛을 권하는 디지털 시대, 엄지 손가락만 바삐 움직이며 스마트폰 화면만을 바라보는 기계적인 응시와 길면 길수록 더는 감응하지 않는 뇌의 퇴행은 곧 휘발되고 마는 도파민만 좇을 뿐이다. 별도의 시각적인 정보 없이 오직 음성에 기대어 귀로 읽는 독서는 상상력의 촉수를 무한대의 영역으로 뻗어나가게 하고, 온전히 집중하고 몰입하는 시간을 제공하기에 디지털 디톡스의 해법이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은 책과 사람을 향한 애정이 없이는 어렵다. 작가가 빚어낸 고유의 문장을 소리에 실어 건네주는 다정함과 온기가 묻어나는 일이기에 그렇다. 독서는 뇌를 깨우고 낭독은 살아있음을 느끼도록 온 감각을 열어준다. AI가 대신할 수도 있고, 오디오북을 틀어놓을 수도 있지만, 낭독가와 청자가 주거니 받거니 서로 소통하는 현장의 공기는 형언할 수 없는 내밀한 주파수가 흐른다. 책의 내용을 들려주고, 귀로 독서하는 이들의 마음과 정서는 오직 라이브로 진행되는 그 현장에서만 존재하니 말이다.






쓸모있는 뇌과학 5 [독서의 뇌과학]

가와시마 류타

황미숙 옮김, 현대지성(2024)


듣는 소설 [첫 여름, 완주]

김금희 장편 소설, 출판사 무제(2025)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마르크 로제 장편 소설

윤미연 옮김, 문학동네(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