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에 대하여
“난 비위가 약해서 케어러는 못 할 거 같아.”
멜번에 이민 와서 첨으로 작심하고 도모한 일은 책모임 조직이다. 이민 초기에 너무 외로웠다. 난 책읽기를 즐기고 수다를 아주 좋아라 한다. 그래서 책모임 이름도 “수다리”다. 나의 아주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기심의 발로로 멜번에 책모임인 ‘수다리’가 탄생했다.
다행히 나처럼 외롭고 수다에 갈증 난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지, 물론 아직까지도 당사자들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모임은 잘 유지되고 있다. 수다리 멤버들은 나를 비롯하여 케어러가 절대 다수다. 이미 나처럼 현장에서 일을 하는 멤버, 나의 지칠 줄 모르는 ‘케어러 직업 예찬’ 꼬임에 넘어가 열심히 자격증 공부 중인 멤버, 자격증을 따고 구직 중인 멤버. 언제든 ‘수다리’가 ‘케어러들의 책모임’으로 탈바꿈을 해서 돌봄 노동에 대해 각자의 경험담을 찐하게 털어 놓는다 해도 전혀 낯설지 않을 판세다.
내 자신이 이런 일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 날 보니, 내가 타인의 변을 처리해 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타인의 똥을 처리해 본 경험이 많나 싶겠지만, 평생 타인의 똥 처리는 내 아들이 기저귀를 차던 몇 년이 전부다.
나도 수다리 멤버의 솔직한 표현처럼, ‘비위 약함’을 한 가닥 하던 사람이었고, ‘유별나게 깔끔 떨던’ 약간 재수없는 젊은 시절을지냈다. 세상에 똥 냄새가 역겹지 않고 똥의 모양과 색이 혐오스럽지 않은 사람도 있나? 심지어 내 자식의 똥 냄새도 역겨웠던 장본인이다.
놀랍게도 돌봄을 업으로 삼고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겠다고 결심하자 자연스럽게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가능한 일이 되어 있었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위력이란 실로 어마 무지한가 보다. 일주일 또는 격주마다 꽂히는 통장의 숫자들이 똥에 대한 역겨움과 혐오를 몰아낸다. 예전처럼 역겹지도 혐오스럽지도 않으니 말이다. 돌봄이란 직업은 나를 똥으로부터도 해방 시켰으니 실로 위대한 직업이 아닐 수 없다.
한번은 백퍼센트 휠체어 사용자(휠체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뜻) 이신 어르신의 화장실 사용을 지원하는데 위생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는데도 소변이 예상치 않은 순간에 흘러나와 내 팔뚝으로 쏟아지는 참사가 있었다. 이 글을 읽는 젊은 분들은 크게 놀라지 마시길 바란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모든 기능들이 퇴화하기에 대소변 관련한 기관들도 제 기능을 잃기 마련이다.
내 장애 고객 중에는 태어나서 청소년이 되도록 기저귀를 찬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기저귀 착용을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들이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된다는 진리를 돌봄을 하면서 깨닫는다.
유일한 소통의 도구라 여겼던 “말”이 더 이상 소통의 도구가 전혀 되지 않는 사람들, 돌이 되면 걷게 된다는 보통의 발달 단계를 밟지 않는 사람들, 두 돌이 지나면 말을 하게 된다는 보편을 박살내는 사람들, 네 살 정도가 되면 기저귀를 뗀다는 정설을 따르지 않고 평생을 기저귀를 차고 살아가는 사람들, 학령기가 되고 학령기를 이미 끝냈어도 여전히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평범성을 벗어난 나의 고객들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나를 옭아맸던 수많은 편견과 낙인과 규범과 당위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안목을 기르게 해준다. 그들에게서 좀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는 위안을 수시로 받는다. 그래서 내 삶이 깃털처럼 가벼워 질 때가 종종 있다.
난 장애지원사(disability support worker)이자 요양보호사(aged-care)를 겸하는 돌봄 노동자다. 이 참에 내 직업을 변과 연관 시켜 정의 내리면,
“남녀노소, 나이에 무관하게 고객의 변을 처리하는 직업을 수행하는 사람”
아니다, 결혼 평등법이 통과된 호주에 사니까, 남녀 이분법적 성별에서 자유로운 고객까지도 포함이다.
*호주의 임금은 월급제는 흔하지 않고 대부분 주별(weekly) 또는 격주(fortnightly)로 지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