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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는 외계인 Apr 06. 2024

나의 돌봄 노동 해방 일지

그녀의 바지런하고 검소한 삶

“할머니, 밑을 닦은 휴지는 변기에 버리셔야 해요.”


90이 다 되어 가는 치매 고객 A는 자꾸만 변을 닦은 휴지를 카디건의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아직 안면도 제대로 안 텄는데 첫 만남이 이렇게 강렬해서야. 데이트 상대가 만나자마자 손을 잡고 키스를 퍼붓고 호텔로 끌고 가는 겪인가?  당황한 내가 정신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또 한번 반복하신다. 손에 묽은 변이 묻는다. 아침 약 복용후엔 변이 묽다며 Sleepover 근무를 하고 퇴근을 하면서 알려준 다른 케어러의 말이 떠올랐다.


“할머니 휴지를 그렇게 조금 쓰시면 안돼요. 변이 손에 뭍잖아요. 이걸 쓰셔…”


혼비 백산한 케어러, 빛의 속도로 휴지를 내 손에 둘둘 말아 부피감 있게 툭 끊어서 손에 쥐어 드리려 했지만, 나의 방식이 맘에 안 드시나 보다. 또 다시 본인의 방식대로 겨우 두 세 칸 정도의 휴지를 끊어 다시 닦는다. 찰나 생각한다. 참 검소하게 인생을 살아오셨구나.


“어른이 된다는 건 말이에요. 더러움을 참을 줄 알게 된다는 거예요.”


시기와 질투가 나도록 글빨이 좋은 이슬아 작가의 표현인데, 이슬아 작가가 말하는 더러움이 타인의 대변에도 포함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만날 날이 있다면 꼭 물어 보고 싶긴 하다. 아무튼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도 더러움을 참을 줄 아는 “어른”이 되긴 했다. 남의 대변 얘기를 이렇게 사과를 아작아작 씹으며 글로도 적고 있다니.


어차피 순식간에 낭비가 심한 자로 전락한 내가 들이대는 두툼한 휴지를 쓰실 분도 아니고, 더러워진 휴지를 변기통에 넣을 일도 없으니, 결국 슬며시 변 뭍은 휴지를 주머니에서 빼려 했다. 할머니는 마치 강도라도 만난 듯 밀치고 하던 일을 꾸준히 하신다. 그냥 지켜 볼 수 밖에 없다. 할머니 저 돈 뺏는 게 아니라, 똥 뭍은 휴지 버리려는 거라구요, 마음 속으로만 항변한다.


“심하지 않은 신체적 또는 언어적 폭력을 사용하는 고객”, “주 케어러가 아니면 불안과 초조함이 증가 함”, 출발 전 읽어 본 케어 플랜에 명시되어 있었다. 24/7 돌봄이 필요한 A에게 난 주 케어러의 부재를 메꾸기 위해 3시간 파견된 케어러다. 처음으로 3시간 분량의 일을 하면서 몇 달간 7시간씩 돌봄을 제공한 케어러들을 흉내내면 낭패를 보기 쉽다. 특히 치매 고객에게 과욕은 금지다. 고객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지 못하니, 돌봄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조급함을 버리고 시간을 두고 흥분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


“고객과 케어러의 안전을 위협하는 돌봄을 제공하지 않을 것”


멜번에서 돌봄의 제 1원칙이다. 모르는 일을 안다고 얼버무리지 않기, 내가 자신 없는 돌봄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기, 케어러에게 신체적 위험이 예견되는 지원은 가급적 피하거나 주변 동료에게 지원 요청하기, 특정한 처치(practice)가 자신 없을 때에는 경험 많은 동료 또는 간호사에게 알리거나(요양원의 경우) 매니저나 코디네이터(가정방문 에이전시의 경우)에게 알려 할 의무를 철저히 교육 받는다. 장애 지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를 할 때 귀에 딱지가 내려 앉듯 들었고, 면접시나 직무 향상 교육에서도 누누이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난 배운 대로 행하는 모범생 케어러다. 할머니 대신 내가 닦아 드리면 참 간단하고 청결할 텐데 호주에서는 케어러가 물리력을 동원해서 고객이 원치 않는 돌봄을 제공할 수 없다. 설사 물리력을 동원한다 해도 내가 수세에 처할 게다. 할머니의 똥뭍은 휴지에 대한 집착은 똥 뭍은 휴지를 뺏으려는 나의 의지 따위와는 비교할 바가 아닐 테니.  


볼일을 마치신 할머니의 손을 닦아 드리려고 보니 손톱 밑이 까맣다. 웬만하면 손톱이라도 깍아 드리고 싶지만 할머니 상태로 보아 불가능해 보인다. 가만히 3분을 소파에 못 앉아 계신 채 집안을 배회하시며 방마다 문을 열고 나에게 설명을 하신다.


“할머니 아침 샤워 어떠세요?”


아, 무정한 그대여, 샤워를 핑계로 옷도 빨고 더러운 휴지도 처리하고 싶은 나의 바람을 외면한 채 할머니는 문을 열고 나가신다.앞 마당에 피어난 각종 꽃들을 꺽어 모으고 마른 나뭇잎들을 잘라 던진다. 케어 플랜에 적힌 대로다, 가드닝을 사랑하시는 분.


할머니가 가드닝에 정신없는 틈을 타 주머니에서 한줌의 변 뭍은 휴지들을 처리한다. 할머니는 한 주먹 꺽은 꽃다발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셔서 부엌 싱크대로 가신다. 그 곳에는 이미 할머니가 꺽을 때마다 다른 케어러들이 화병에 담아 놓은 꽃들로 가득하다.  시든 꽃들을 버리고 새로 꺽은 꽃을 꽂자마자 할머니는 또 나가신다. 종종 거리며 따라 나서며 생각한다. 참 바지런한 삶을 살아오셨구나.


거실의 탁자에는 가족 사진첩이 펼쳐져 있다. 24/7 케어러들이 번갈아 가며 돌봐야만 하는 할머니에게 과거 기억을 잠시나마 붙들어 두고 싶은 가족들의 바람일 게다.


“I don’t know.”


남편 같아 보이는 분과 얼굴을 맞대고 찍은 사진을 들이 밀며 누구냐고 물어도, 딸처럼 보이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며 물어도 할머니의 대답은 동일하다. 앨범 속 사진이 빛 바랜 속도보다 할머니의 기억이 소멸해 간 속도가 빨랐다. 할머니의 기억은 한 때 가장 소중했고 사랑했을 가족들마저 놓아 버렸다.


에이지드 케어나 장애인 고객들에게 삼시 세끼 밥 먹듯 많이 듣는 말, I don’t know!


비단 돌봄이 필요하신 어르신들이나 장애인들 만이 아니라, 호주의 문화인 듯하다. 한국 사람들과는 다르게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모든 형용사와 부사가 상대적이라면, 나의 비교 대상은 결국 한국과 호주다. 어쩌겠는가? 내가 살아온 나라가 이 둘 뿐인 것을. 어쨌든 나도 얼추 호주 문화에 물들어 가는지 입에서 잘도 나온다. “잘 모르겠는데요!”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비법이기도 하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달리 뭐라 하겠나.

 

갑자기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신다. 웅얼웅얼, 알아들을 수 없어서 몇 번을 물어 겨우 나에게 어디로 좀 데려가 달라고 하신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내가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음 케어러와 교대할 시간이 다가와서 지금은 갈 수가 없다고, 다음 케어러와 다녀 오시라고 하니 얼굴이 굳어지면서 화를 내신다. 그리고는 때마침 출근한 케어러를 보자마자 내 흉을 보기 시작하신다.


출생이란 출발역, 누구나 돌봄이 필수인 애로 태어나는 건 공평한데, 죽음이란 종착역에서는 운이 갈린다. 운 좋은 부류는 타인의 돌봄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 채, 운 나쁜 부류는 다시 어린 애처럼 전적으로 타인의 돌봄에 의존하다 생에 “마침표”를 찍는다.


내가 어느 부류에 속할지 미지수, 당장 내일 치매라도 걸릴 듯 초조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 놓은 유일한 자식, 12살 짜리 아들에게 묻는다.


“너 치매가 뭔지 알아?”

“알아. 인지 기능이 떨어지는 거지?”

“그래, 나중에 치매가 엄마에게도 올 수 있는데, 니 얼굴과 이름을 기억 못하면 엄마를 요양원에 넣어야 해.”

“알았어.”  

“혹시 엄마가 요양원 가기 싫다고 우겨도 넣어야 해. 알았지? 넌 니 삶을 살아가야 해.”

“알았어.”     


쿨한 아들이어서 다행이다.



*24/7: 24시간 주 7일을 뜻하는 표현

*장애 지원사 자격증: 멜번에서는 장애 지원사 자격증을 갖고도 에이지드 케어에서 일을 할 수 있고, 에이지드 관련 자격증을 갖고도 장애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음. 교육과정이 대동소이 하고 하는 일 또한 대동 소이한 경우가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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