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 있는 자신감
면접보러 가는 길.
룰루랄라,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마음이 이랬을까. 에이지드 케어러와 장애 활동지원사로서 일한경력 이년 만에 영문 이력서 작성과 면접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다. 이 분야 면접에서 어떤 질문이 나올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몸과 머리와 입은 일제히 각자의 몫을 훌륭하게 해낸다. 자동반사 수준이다. 이미 몸을 스쳐간 경험들은 흔적을 남겨서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
내 취향과 능력과 수당에 맞춰 여러 번 에이전시를 골랐다. 고인 물은 썩는다, 모든 경험은 유용하다, 메뚜기처럼 옮겨 다닐 수있는 것도 능력이다 자부하면서 조건 좋은 에이전시를 찾았다. 철밥통이라 불렸던, 그래서 겸직이 불허했던 한때 한국 전직 교사였을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자유와 해방감이 덮친다. 중년의 나이에 좋은 직업이란 철밥통이 아니라, 내가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그만두고 싶을 때 쉽게 그만두는 직종에서 일하는 것이다. 깃털처럼 가볍게 살고 싶다. 그래서 난 파트타임이 아니라 캐주얼 즉, 시급제 알바를 선호한다. 물론 시급이 세기도 하지만.
에이전시를 환승하는 일은 잘 닦인 고속도로를 운전하듯 쉬웠다. 내가 특출하게 잘나서? 그럴 리가 있나. 진실은 이렇다. 흔히선진국이라 불리는 먹고 살 만하고 의료적 기술과 시스템이 발달하고 사회보장이 대체로 잘 작동하는 나라에서는 고령화가 가장큰 사회적 이슈다. 백세시대라고 여기저기 떠들지만, 9988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삼사일 만에 사망)로 살다 죽는 경우는로또 당첨처럼 희박한 확률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날 확률이 낮은 것처럼 말이다.
에이지드 케어에서 일을 해보니 이것은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얀 것처럼 기정 사실이다. 내 고객의 대부분은 80-90대 노령이고 오랫동안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살고 있고, 앞으로 몇 년을 더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살지 기약할 수 없는 운명들이다. 그렇다 보니 돌봄영역은 일자리가 콸콸 넘쳐 흐른다. 일터와 일거리가 사시사철 넘쳐 흐르는 곳이고, 그래서 나같은 돌봄이 적성이고 특기인 사람에게는 꿀과 젖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일터다. 눈 떠 보니 평생 은퇴 걱정 없는 일을 하고 있네?
10여년간 가족을 돌봤던 돌봄의 달인은 가정에서 직장으로 위치만 옮겼다. 십년은 옛말이 된지 오래고 몇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광속으로 돌아 가는 세상에서 십년이 넘게 기본기를 다진 몸인데 어디 간들 면접 통과를 못할까? 그러니 내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다. 면접 스트레스가 프리한 직종이라니, 세컨드 인생 직업으로 환상적인 직업을 택했다.
호주는 능력주의가 희박하다 못해 호흡 곤란이 올 지경이다. 물론 이 능력주의란 것도 상대적인 것이어서 내가 한국에서 왔기 때문에 호흡곤란을 겪는 것이다. 뒷통수를 너무 세게 맞아 다리가 후들거릴 때가 있는데, 오지 로컬들이 호주의 능력주의를 한탄할 때이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일을 하지?’
처음에 호주 오면 한국에서는 도저히 눈을 뜨고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의 노동자들이 노동을 한다. 병원에서 간호사가 지팡이를 짚고도 절룩거리며 여유롭게 일을 하고(한국의 초스피드 사회에서는 상상이 되지 않던), 관공서에서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를 두드리며 일을 하는 노동자가 있고, 거리에 나가면 장애인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넘치고(장애 지원사와 장애 고객이 함께 다니는데 가끔 누가 장애지원사고 고객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구멍이 송송 난 옷을 입고 있고 작업화를 신고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하는데 알고 보면 박사다. 한국은 외모와 차림새도 능력인데 말이다.
‘저런 것도 자랑스러울 수가 있는 건가?’
오지 로컬들은 자랑스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래서 기대를 가득 품고 들여다 보면 한국인의 기준에는 ‘창피스러운’ 수준이다. 물론 이것도 한국과 호주의 비교에서 온다. 특히 두 국가를 살아내는 이민자들은 일상적으로 내 모국과 이민국이 비교된다. 내 장애 고객은 노래에 푹 빠져서 몇 시간이고 노래를 부르는데, 발음도 새서 대화도 자연스럽지 않은데도 내가 인사치레로 ‘노래 잘한다!’ 칭찬하면, ‘알아. 난 노래 잘해. 난 내가 자랑스러워.’ 답한다. 공부는 허당인데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를 두고 오지 부모는 아이가 자랑스럽다고 진심으로 말한다. 세컨더리 다니는 아들 학교의 음악 콘서트에 가면 한국이라면 무대에 올라 오지도 못할 듯한 왕초보 아이들이 무대에 올라와 연주를 하고 교사와 부모들은 자랑스럽다고 한다. 기타를 제대로 잡는 법도 모르고 곡을 전부 연습도 안 해서 중간에 손 놓고 있는데도 그렇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자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행태들인데 난 어찌됐든 한국이 아닌 호주에 살고 있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법이다.
“음악 천재구나. 피아노 전공하는 거야?”
한국 살때 한 외국인이 초등 내 조카가 피아노 치는 것을 보고 감탄하며 한 말이 호주에 살아보니 이해가 된다. 물론 내 조카는 음악 천재도 아니고, 입시공부를 해야 해서 피아노와 안녕한지 오래고, 내 조카는 항상 “전 잘 못쳐요!”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한국은 능력주의가 만발하여 모두가 완벽을 기대하며 능력이 넘치는데도 겸손인지 자기 비하인지를 일삼고, 호주는 반대로 능력주의가 미천하여 그냥 태어난 대로 제 잘난 맛에 사는 나라 같다.
남과 비교를 잘하지 않고 그래서 경쟁도 느슨한 호주, 대학을 진학하지 않는 고 3들이 많은 호주는 직업 간의 귀천도 낮은 편이다. 한국에 살고 있었다면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즐겁게 자랑스럽게 하진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직업 간의 구별이 적은 이유는 몸 쓰는 노동자들에게 시급을 잘 주기 때문이다. 수당 좋고 처우가 좋은 곳에는 일군이 모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장애 지원과 에이지드 케어 분야에는 젊은이들이 많다. 아무래도 커뮤니티 활동이 많은 장애 지원쪽이 에이지드 케어보다 젊은이들이 많다.
“돈을 더 벌고 싶어서요.”
너무나 자연스럽게 숨을 내뱉듯 말했다. 처음으로 요양원 면접을 봤다. 중국어 악센트가 강한 면접관 미쉘은 왜 홈케어와 장애지원사로 일을 하면서 요양원에서 일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내 대답에 미쉘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자기도 애가 둘인데 애가 크니까 시간이 많이 남아서 돈을 더 벌려고 일을 늘렸다고 했다. 멜번 살면서, 멜번에서 일을 하면서 느끼는 해방감은 돈과 관련해서도 이어진다. 오지들은 돈과 관련해서 참 편하게 얘기를 한다. 한국에서는 돈 얘기를 꺼내는 일이 참 어려웠다. 한국은 소비/시장 자본주의 최전선에 선 나라인데 돈 얘기를 직접적으로 하는게 참 어려웠고, 호주는 상대적으로 사회민주주의 국가이고 한국과 다르게 시장자본주의가 덜 침략한 나라인데 다들 돈 이야기를 편하게 한다. 한국에서 온 지인들은 호주의 백화점에서는 살게 없어서 돈을 못쓴다고 하소연도 한다.
미쉘은 면접 내내 흡족하다. 질문에 내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음 질문으로 간다. “See you later soon!” 인사하며 헤어지는 내 뒤통수에 대고 미쉘은 외친다.
“우리 요양원에 shift 는 진짜 많아요. 원하면 돈 많이 벌 수 있어요!”
문을 닫으며 속으로 생각한다.
‘그 shift 다 받다간 내 몸이 상하겠지.’
*오지(Aussie) : 호주인을 일컫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