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장애인이고 싶어요
장애란 말을 자주 쓴다. 장애란 말을 혐오하고 비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애를 미화하고 신비화하는 일도 경계한다. 장애는 가치 중립적인 개념이고 장애는 인간 발달의 한 변이(variation)라고 받아들인다. 평균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No! Don’t touch me. I don’t like it!”
따뜻하고 순한 성품의 소유자인 그녀의 입에서 갑자기 쏟아진 말이다. 관절이 자유롭지 않은 손까지 사용해서 의사표현을 한다. 평소 얼굴 표정이 단조로운 발달장애인이지만 나름 꽤 진지하다.
교육을 참 성실히 받았나 보다. 성교육에서 종종 다루는 장면이다. 집 근처 특수학교에서 한달간 실습을 받을 때 교사들은 비디오 영상을 사용하며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다. 교사들의 기대에 부응해서 몇 몇 장애 어린이들은 열심히 모방을 했다. “NO! Don’t touch!” 언어란 것으로 표현할 수 없는 장애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열심히 몸 동작도 가르쳤다. 상대의 면전에 손바닥을 활짝 펼쳐서 “노”란 사인을 보내야 한다. 글쎄 장애 아동을 노리는 성폭력범이 이 아이들의 어설픈 “노”를 진짜 “노”로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어릴때부터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았을 게다. 훌륭한 교육이고 배움이다. 문제는 상황과 대상을 딱딱 야무지게 구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장애 지원사인 내가 비비 꼬인 가방 끈을 챙겨 줄 때도(참고로 그녀의 가방 무게는 내가 한창 배낭 여행 다니던 시절 무게만큼 후덜덜하다), 소변을 본 후 제대로 수습 못하는 바지를 정리해 줄 때도, 변을 보고도 뒷감당이 안돼서 내가 다가갈때도, 얼굴에 묻은 치킨 쪼가리를 떼어주려고 할 때도, 용변 후 손가락 끝만 흐르는 물줄기 밑에서 놀고 있고, 거품 비누는 손바닥에 하얗게 남아 있어 손 씻는 법을 가르쳐 주려고 할 때 종종 듣는다. 장애인이지,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끔은 “노”란 말을 내 머릿속의 교환기를 작동해서 “고마워”란 말로 바꿔서 듣는다. 장애 지원사를 하면서 생존에 필요한 신박한 능력들을 나름 고안해 오고 있다.
42살, 길고 밝은 금발머리, 언제나 깨끗하고 센스 있는 옷과 엑세사리를 착용(센스있는 엄마가 사 준 옷을 센스 있는 장애 지원사가 아침마다 매칭해 줌)하는 M은 11페이지의 support plan을 갖고 있다. 심각한 지적장애인이다. 그녀의 주 장애 진단명은 지적장애이나 그 외에 다양한 공존 장애(co-occuring)를 줄줄이 지녔다. 장애 분야에서 당사자와 가족들을 환장하게 만드는 조건 중 하나는 대부분 메인 장애는 외롭게 혼자 찾아 오지 않는다는 불편한 사실이다.
우영우 신드롬 덕에 전 국민이 알게 된 자폐를 예로 들어 보면, 자폐란 장애가 흔하게 동반하는 공존 장애는 다음과 같다. ADHD, 지적장애, 언어 장애, 감각장애, 프로세싱 장애, 강박장애, 수면장애, 섭식장애, 불안장애, 조울장애, 우울증, 심지어 어떤 연구에서는 조현병도 자폐인에게서 높게 나타난다고 한다. 그야말로 맘먹고 구성하는 종합 선물 세트도 이렇게 다양하게 구성되기 어려울 지경이다.
마찬가지로 M은 심한 불안장애와 언어장애, 그리고 섭식장애인이다. 그녀는 전혀 읽고 쓸 줄을 모른다. 무학인 내 아버지가 평생 읽고 쓸 줄을 모른 채 돌아가셨는데,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 21세기에 선진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비장애인으로 살아왔으니 장애계에 일하면서 내 몸에 체득된 기존의 질서와 체계는 전복을 당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들을 편하게대할 수 있다. 읽고 쓸 줄 모르는 고객의 숫자가 늘면서 내가 영어로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이 마치 대단한 능력처럼 과포장됨을 느낀다. 다른 비장애 호주인들과 만나면 나의 영어 능력은 바짝 쪼그라드는데, 장애인들과 생활하면 내 설익은 영어가 마침내 제기능을 한다는 황홀감에 취한다.
부모가 열심히 가르치지 않은 것인지, 부모와 교사들의 투쟁 같은 열심이 낮은 지능이란 거대한 장벽을 돌파하기엔 역부족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42년의 세월, M과 그녀의 가족이 살아 내었을 시간들을 난 잘 알지 못한다. 장애 지원사는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원하는 사람일 뿐이고, 나는 읽지 못하고 쓸 줄 모르는 그녀의 눈이 되고 손이 되어줄 뿐이다.
“언제 모닝티(Morning Tea) 먹을 거야?”
“언제 점심 먹을 거야?”
“오늘 사탕 살 거야?”
“오늘 케이크 먹어도 돼?”
그녀의 머릿 속은 오로지 음식들로만 채워져 있다. 매주 월요일 오전 9시, 그녀를 만나는 순간부터 3시에 그녀가 사는 지원 그룹 홈(supported group home)에 데려다 줄 때까지 먹는 얘기만 한다.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먹는 얘기다. 일관적이고 지속적이란 면에서 감탄과 경이로움이 찾아온다. 지원이 끝나갈 때쯤이면 귀에 딱지가 앉고 피고름이 나는 기분이다. 하루에 고작 6시간, 일주일에 한번 들어도 이렇게 괴로운데 부모가 지원 그룹 홈에 보내기 전까지 살아왔을 인생을 조금이나마 유추해 본다. 나였다면 어떤 방법으로 인고의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M은 음식만 보면 달려든다. 길거리에 떨어진 음식도 마다하지 않는다. 금발 머리의 말끔한 옷차림새에 예쁘게 생긴 성인 여자가말이다. 장애, 장애인이란 단어가 없으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녀와 단 둘이 보내다 보면 인간은 동물이란 진실이 새록새록 뼈에 각인된다. 먹는 일 앞에 장사 없다는 말도 진리다. 덩달아 내 하루도 군더더기 없이 단순해 진다. 돈 벌기, 가사일, 아들 돌보기 등으로 분주한 내 인생은 24시간이 분 단위로 쪼개져서 낭비 없게 사용되어져야만 하루가 돌아가는데 가끔 그녀의 인생이부럽기 까지 하다. 나도 하루하루를 뭐 먹을까만 근심하고 그 마저도 영양사와 의사와 케어러들이 매일 영양가에 맞춰 다양한 음식과 간식들을 제공하면 참 편하겠단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인생이 M의 인생보다 딱히 좋아 보이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Hello? What’s your name?”
M은 인사성이 밝다. 때와 장소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이가 친구인양 인사를 하며 걷는다. 사랑에 불이 붙어 끌어안고 키스를 하는 연인들에게도, 길거리의 홈리스에게도, 전화기에 언성을 높이고 있는 중년 여성에게도,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삼매경에 빠진 중고생들에게도… 가리지 않고 인사를 한다. 왜 지적장애 소녀와 여성들이 숱하게 남성들의 성적 먹잇감이 되는지를 매주 월요일마다 실감한다. 몇 번 가르쳐 보려고 했으나 포기했다.
그녀는 심각한 지적장애고 마흔이 넘었다. 수많은 교사와 부모가 이 노력을 안 해 봤을까? 어릴 때부터의 수많은 교사와 부모의 수년간의 전투 같은 노력이 먹히지 않았다면, 나도 시도하지 않는게 그들에 대한 예의고 M에 대한 예의다. 어차피 M은 지금처럼 앞으로도 언제나 누군가의 케어를 받으며 살다 생을 마감할 게다. 백세 장수의 시대에 우리 대부분이 나이 들어 결국 나같은 케어러의 돌봄을 받다 죽듯이 말이다. M은 단지 평생 돌봄을 받다 죽을 뿐이다.
M이 타인에게 인사를 잘하고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다가가는 것은 못되고 나쁜 일이 아니다. 사리분별을 정확하게 배우기 힘든 지적 장애인 그녀에게 지능이 평균치에 들어간 우리와 같은 처신을 기대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 어려운 불가능에 매달리느니 비장애인 우리가 이들을 무시하지 않고, 성적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들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면 될 일이다. 이 방식이 효과적이고 안전하고 세상의 평화를 추구하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그녀 곁에 평생 존재할 나같은 장애지원사들의 자질과 직업적 윤리를 더 철저하게 교육하고 검증하면 될 일이다.
“다음 생엔 호주에서 장애인으로 태어나도 괜찮을 거 같아.”
장애 자녀를 키우는 지인과 대화하다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진심이기도 하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세상을 꿈꿔 보는 일이 자연스럽다면, 비장애인 내가 장애인의 세상을 꿈꿔 보는 일도 자연스럽다. 장애 지원사로 일하는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니 신빙성이 좀 있긴 할 게다. 대신 조건은 있다. 한국이 아닌 호주란 나라에서, 그리고 자녀의 장애를 부끄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나같은 부모 밑에 태어나는 일.
난 장애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나에게 장애나 장애인이란 단어는 가치 중립적이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단어로 머리에 인식이 되었다. 비장애, 비장애인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말처럼 말이다. 비장애인이란 단어를 장애인과 비교해서 설명할때 사용하는 표현인 것처럼,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비교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장애, 장애인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됐다. 나는 이 둘의 경계를 끊임없이 드나들며 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일을 하는 장애지원사이다.
금요일쯤 되면 월요일이 기다려 지곤 한다. M이 보고 싶다. 그녀의 순수함이, 지극히 본능에 충실한 삶의 자세가 일주일 치 내삶의 자양분이 된다. 그녀가 나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그렇게 안달복달하며 복잡하게 살지 않아도 한평생 다 간다고. 그러니 나랑 같이 모닝티나 먹자고 권유한다.
“언제 모닝티 먹을 거야?”
*모닝 티(morning tea),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 오전 오후 간식, 커피나 차와 함께 간단한 다과 시간인데 호주 사람들의삶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문화, 에이지드 케어(요양원)에서 이걸 놓치면 속상해 하시는 어르신들이 많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