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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는 외계인 Jul 20. 2024

나의 돌봄 노동 해방 일지

멜번 촌사람, 한국 방문하다


짧게 한국을 다녀왔다. 요양원에서 근무를 하니 수시로 한국의 요양원에 거주하고 계시는 엄마가 생각난다. 내가 한국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자주 요양원을 방문 했을까? 요양원 대신 나랑 함께 살자고 할 용기가 있었을까?

 

모든 가정은 결국 후회나 반성의 산물이 되곤 한다. 가정은 가정일 뿐, 지금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내가 한국에 살았으면 지금처럼 요양보호사가 되어 있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돌봄”이란 일을 직업으로 삼지 않았으면 감히 돌봄을 맡겠다고 나서지도 못했을 게다. 사람이 일자리를 만들어내지만, 또 해당 일이 사람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돌봄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결과적으로 내가 돌봄에 익숙한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돌봄 일을 하기 전의 나? 그저 돌봄은 두려움이 앞서고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가장 중요하게 난 십 남매의 아홉 번째 자녀다. 나 말고도 엄마를 돌보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 줄 언니 오빠들이 줄줄이 있다.  


딱 5년만에 엄마랑 재회했다. 5년만의 한국 방문이란 뜻이기도 하다. 감히 어떤 나라도 앞설 수 없는 울트라 초스피드의 사회인 한국은 역시 화끈하게 변해 있었다. 태어나서 사십 여 년 살아온 내 나라에 가서 문화 충격을 온 몸으로 당한다. 호주 문화에 익숙해진 내 몸과 온갖 감각들과 기준들은 역문화 충격에 소스라친다. 아직도 대부분의 집이 열쇠로 문을 열고 잠그는 멜번에서 갑자기 온 나라가 최신식의 테크놀로지들로 무장한 환경에 휩싸이다 보니 완전히 섬나라에서 살다 처음으로 도시 구경 나온 아이처럼 눈이 휘둥그레 해지고 어리둥절하다. 


한국의 변화 속도에 맞춰 엄마도 초스피드로 노쇠하셨다. 거주지를 오빠 집에서 요양원으로 옮기셨고, 엄마의 온갖 기능들은 몰라보게 퇴화했다. 젊은 사람의 시간과 노인들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른다더니 한국의 변화를 보는 놀람 만큼 엄마의 변화를 보는 일이 어질어질하다. 아들을 키울 때의 시간은 성장과 발육과 희망을 품게 하더니 노쇠한 엄마의 시간은 퇴화와 질병과 통증과상실로 자리매김한다. 


엄마는 음식을 씹고 삼키는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리셔서 콧줄로 영양액을 투여하며 삶을 이어가고 계신다. 다리의 기능 또한 완전히 잃으셔서 요양보호사의 도움 없이는 침대를 한 시도 벗어날 수 없다. 요양보호사께 문의해 보니 요양보호사 두 분이 엄마를 들어 올려서 휠체어에 옮기고 휠체어에서 침대로 옮긴다고 했다. 일주일에 두 번 목욕을 시킨다고도 했다.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아들 집에서 며느리 랑은 안 살아.” 


뇌경색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이 말을 평생 입에 달고 사시던 엄마는 본인의 다짐과 결의와는 완전히 반대의 노년을 살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은 저렴한 요양원이다. 하루에 두 번도 샤워를 하시고, 가만히 누워 있지 못하시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바지런하던 엄마가 저렇게 삶을 마감할 줄 누가 알았을까? 


“나이가 드는 것은 드넓은 저택에서 점점 작은 공간에 몸이 묶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나하나 탐색해 보기를 즐겨 마지않던 방들의 문이 서서히 닫히는 기분” 이라고 일갈한 벤키 라마크리슈난의 말이 딱 내 엄마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서럽고 애통하다. 자식이 가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따라 간다던 엄마는 5년만에 찾아 온 딸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신다. 눈꺼풀도 중력을 이겨낼 힘을 잃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시니 나의 얼굴을 시선으로도 담아내지 못한다. 내가 일하는요양원에서 만나는 중증의 어르신이 바로 내 앞의 엄마란 사실이 기가 막힐 뿐이다. 더불어 내 삶의 마지막도 크게 다르지 않을거란 사실에 삶 앞에 겸손해 진다. 늙음과 죽음은 가장 강렬하게 인생 앞에 겸손을 배우게 한다. 


내가 근무하는 요양원에 사시는 105세 할머니는 아직도 인지 기능을 유지하고 계셔서 내가 인사만 드려도 “Hi darling, thank you!”를 연발하시고, 95세의 깐깐한 할머니는 100세를 채우면 영국의 버킹검 궁전에서 축하 자격증을 보내준다고 100세 채우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시는데, 내 엄마는 너무 일찍 허망하게 각종 기능들을 잃어버리셨다. 이 분들 정도의 기능과 인지만 남아있어도 얼마나 좋을까 아쉬움이 넘쳐 흐른다. 


내 엄마가 호주에 살았다면 좀 달랐을까, 부질없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드는 순간이 있다. 엄마처럼 똑같이 뇌경색으로 입원했다 퇴원하여 집에서 재활을 하고 계신 어르신을 지원한 적이 몇 번 있다. 재활 기간 동안 정부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돌봄사들을 집으로 파견해서 간단한 집안일, 목욕지원, 간단한 장보기 등을 돕도록 하는데 내가 배정을 받았다. 각종 재활 치료에 전념이신 80세 초반의 고객은 오른쪽 팔이 불편하고 말이 약간 어눌하셨다. 


물리치료사, 언어 재활 치료사 들로부터 필요한 재활 치료를 지원 받고 계셔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셨다. 고객이 원하면 집으로 찾아와 재활을 지원했다. 심지어 급작스런 건강과 상황의 변화로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수 있다고 심리 치료사까지 배당되어 심리적 안정을 취하고 계셨다. 


화가 날 정도로 너무 부러웠다. 고객보다 젊은 나이에 뇌경색이 강타한 엄마도 누구보다 건강하고 인지능력 좋고, 말도 잘하던 분이었는데, 엄마는 내 고객 어르신처럼 적절한 재활치료를 받지 못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엄마는 심리 치료사는 사치일 뿐이고, 꼭 필요했던 물리치료, 언어 재활 치료 조차도 한번도 제때 받지 못했다. 의사들은 초기에 재활치료가 중요하다고 가족들에게 열심히 재활 시켜야 한다고 하지만, 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재활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일주일에 몇 번씩 걷지 못하는 당사자를 치료실로 이동시킬 수 있는 좋은 환경에 살지 못한다. 그 때 엄마는 엘레베이터 없는 연립주택 3층에 사셨으니 장정이 엄마를 들어 옮기지 않고서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내 엄마도 호주에 살아서 내 고객처럼 의사가 치료사들을 연결해주고, 의사나 간호사나 치료사들이 거동이 어려운 환자들의 집으로 직접 찾아와 방문진료와 치료와 케어를 해주고, 가정방문 돌봄사들을 파견해 가족들의 돌봄 부담을 줄여주었으면 얼마나좋았을까? 엄마가 쓰러지셨을 당시 우리 가족들은 세상에 이런 방문 서비스를 하는 나라가 존재하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아니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에 이런 서비스가 실행되고 있는지 들어본 적이 없다. 


모두가 헛되고 헛되다. 가정으로 가득 찬 한국 여행은 한국의 속도 마냥 빨리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난 지금 내 몸의 속도와 인지의 속도에 제법 잘 맞는 멜번으로 다시 돌아왔다. 멜번 촌 사람이 상쾌한 공기를 허파로 가득 빨아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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