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요양보호사 C 인터뷰 - 돌봄은 결국 사람 간의 관계죠.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한다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모든 문화권은 죽음이 완전한 끝임을 거부하는 믿음과 전략을 함께 발달시켰다. 철학자 스티븐 케이브는 불멸성의 추구야말로 인간 문명을 이끈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왜 죽는가>, 벤키라마크리슈난
서는 곳이 다르면 풍경이 다르듯, 정규직 공무원에서 비정규직 시급제 알바로 노동의 형식을 옮기면 세상의 문법이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 세상을 보는 시각에 전복이 일어난다. 이런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은 나의 몸과 정신을 짜릿짜릿하게 각성시키고 몸써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샘솟게 만든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안달이 난다. 이제껏 모르고 살아왔던 세상의 안개가 걷히고 그 속에 꼭꼭 숨겨져 있던 보석같이 빛나는 삶의 희노애락들이 내 온 감각들에 포착이 되어 달라 붙는다. 진귀한 경험들이다.
“아이고, 이까짓 일이 뭐라고 인터뷰를 해요?”
손사래 치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시는 C를 설득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이까짓” 일이 아니고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직업이라고, “이까짓” 일도 기록하면 “의미 있는” 일이 된다고,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 훨씬 많은데 세상은 화이트 칼라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글이 넘쳐 난다고, 그러니 이젠 몸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 나야 한다고, 지나친 겸손은 후배 요양보호사들에게 폐가 되기도 한다고, 엄포 비슷한 것들을 전달하고 겨우 승낙을 받았다.
오십, 즉 나와 비슷한 나이에 요양보호사가 되어 65세에 은퇴를 하신 인생의 선배이자 같은 직업계의 선배인 C는 요새 삶에 제2의 날개를 달았다. C를 알게 되면 은퇴가 기대된다. 영어를 배우러 대학에도 나가시고, 자원 봉사를 하러 다니시고, 각종 운동을 배우시고, 사회참여를 열심히 하신다. 워낙 새로운 배움을 좋아하고 활동적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C는 은퇴 후 밀물처럼 밀려오는 “남아도는” 시간들을 어떻게 유용하고 유익하고 건강하게 보낼까 행복한 근심으로 하루하루를 채우신다. 아직 정기적으로 먹는 약 한 개가 없다면서 은근 자부심을 드러내시는 얼굴엔 건강한 미소가 넘실댄다.
요양원에서 PCA(Personal Care Assistant, 요양보호사)로 몇 년 동안 일하셨어요?
오십 살에 시작해서 14년 8개월 정도 일하고 65살에 은퇴했어요. 사립 요양원에서 주로 일을 했죠. 운이 좋게 high needs 어르신들이 많지 않은 곳에서 일을 해서 일이 좀 수월했어요.
어떤 계기로 요양보호사가 되셨나요?
싱글맘이다 보니까 주로 캐주얼(비정규직 시급제 알바)로 안 해본 일이 없죠. 양말 가게에서 일을 하다가 대출을 얻어서 집을 사고 싶은데 캐주얼들은 대출이 쉽지 않잖아요. 아무래도 캐주얼들은 수입이 일정하지 않으니까 은행에서 대출을 쉽게 해주지 않죠. 그래서 카운슬(Council, 한국의 구청 비슷한 호주의 정부 기관)에 문의를 했더니 에이지드 케어 에서 일해 보는 게 어떠냐며 PCA 교육을 소개해 주더라고요. 교육비도 무료라고 하고 6개월 정도 교육을 받으면 요양보호사가 된다고 해서 시작했어요.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다급하니 시작했죠.
교육을 받으신 후에 어떻게 직업을 찾으셨어요?
처음엔 이 분야 정보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하니까 어쩌다 일하게 된 곳이 개인이 운영하는 아주 작은 요양원 이었어요. 방 35개짜리 작은 요양원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한국에 다녀왔더니 요양원이 문을 닫은 거예요. 그래서 수당도 못 받은 적이 있죠. 앞으로 작은 요양원에서는 일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죠.
요양원에서 일하면서 어떤 점이 재밌었나요?
사람마다 다 다르잖아요. 거기 사시는 어르신들이 각자마다 성격도 다 다르고 취향도 다 다르고. 그게 재밌어요. 나는 성격 자체가 활달하다 보니까 어르신들하고 말하고 활동하는 일들이 즐겁더라고요. 요양원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저도 젊은 나이가 아니다 보니 저하고는 잘 맞았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어르신이 계신가요?
처음엔 요양원에서 어르신들이 돌아가신다는 생각 자체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어르신 한 분이 11월에 저에게 초콜릿하고 다음 해 달력을 선물로 주시는 거예요. 왜 12월 연말도 아닌데 벌써 주시나 했더니, 본인은 내년까지 못 산다며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선물을 나에게만 주시더라고요. 그 때 뭉클했어요. 아무래도 내가 나이가 있는 요양보호사다 보니까 이삼 십대 젊은 요양보호사들보다는 어르신들에 대한 이해 폭이 좀 더 넓지 않았을까, 그래서 어르신이 이뻐했던거 같아요.
요양원에서 일하시면서 죽음도 대면하셨을 텐데 입주자가 사망하시면 어떤 절차를 밟나요?
사망하시기 직전에 RN(Registered Nurse)이 의사를 불러요. 의사의 사망선고가 떨어지면 깨끗하게 닦이고, 눈도 감겨 드리고, 새 옷과 새 기저귀로 갈아 드리죠. 보통 미용사가 있으면 미용사가 머리도 예쁘게 손질해 드려요.
처음에 입주자의 죽음을 직면하실 때 어떤 느낌이셨나요?
사망했다는 생각보다는 주무신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에요. 눈 감고 주무시는 거 같죠. 그리고 갑자기 돌아가신게 아니고 요양원에 오랫동안 같이 계셨고, 갑자기 몸이 노쇠한 게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다 돌아가시는 거니까 요양보호사에게도 일련의 자연스런 과정으로 다가와요.
가장 어려운 어르신은 어떤 분인가요?
예민하고 까다로운 분요. (둘이 폭소) 진짜 까다로운 고객 한 분이 기억나는데, 침대에 눕혀 드리면 본인이 원하는 자세에서 각도 1도만 틀어져도 짜증을 내시고, 양말도 꼭 본인이 원하는 양말이 원하는 날에 있어야 하는데, 공동 생활인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잖아요. 할머니는 아직 세탁이 안된 양말 가져오라고 성화지, 요양보호사들은 양말을 대령할 수 없지. 미치죠. 그런 게 너무 힘들죠.
지금 68세 이시죠. 본인의 노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저도 요양원에서 일하면서 노후에 살 주거 공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보통 어르신들이 요양원 입소를 꺼리시잖아요. 갇힌다고 생각하시고, 자식들이 버린다고 생각하시잖아요. 요양원에서 15년 일하신 분의 생각은 어떠 신지 듣고 싶어요.
그런데 꼭 그렇진 않아요. 그 안에도 각자의 삶이 있어요. 요양원 들어간다고 바로 외부에서 이어지던 삶이 모두 일순간에 끝나는 게 아니 예요. 의사의 판단과 허락 하에 외부 활동이 허락되고, 보호자 동반을 조건으로 외출하는 분도 계시고, 본인 방에서 식사하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식사하시고, 특히 low needs 인 입주자는 모여서 뜨개질도 하고, 색칠도 하고, 텃밭도 가꾸시고, 특별한 날에는 파티도 여는 등 여러가지 활동들도 하죠. 그러니까 생각하기 나름인 거 같아요. 요양원에 갇혀서 죽어서야 나간다고 생각하면 서글프겠죠. 반면에 난 여기에서 친구들하고 같이 어울려 살고,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이어가고, 항상 도움을 주는 직원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진 않죠.
근데 말씀하신 것처럼 다양한 활동들과 좋은 여건을 갖춘 요양원은 사립으로 비싼 곳들이잖아요?
그렇죠. 요양원 마다 다 다르죠. 내가 마지막으로 일한 곳은 처음 입소할 때 본드(bond, 보증금)로 호주 달러 55만불(한화로 5억 이상), 매달 호주 달러로 천팔백불(한화로 백육십만원 이상) 내야 해요. 돈 있는 사람들이 사는 요양원이었죠. 전 가난한 사람들이 가는 공립에선 일해 본 적이 없어요. 아무래도 사립보단 열악하다고 들었어요.
본인도 나중에 요양원 입소를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럼요. 할 수 밖에 없죠. 그런데 요새 호주 에이지드 케어 분야에 가정방문 요양보호사들 서비스가 늘어나고 있잖아요. 그 서비스 받으며 집에서 끝까지 살다가 더 이상 불가능하면 요양원에 가야죠.
요새 돌봄 일이 사회적으로 많이 필요하잖아요. 장애나 어린이나 에이지드 케어 분야 등에서요. 돌봄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꼭 돌봄 만이 아니라, 모든 직업에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일을 즐기며 재미있게 일하는 사람들이 좋은 거 같아요. 요양보호사들 중에 이 직업이 본인과 맞지도 않는데 돈을 벌어야 하니까 마지못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볼 때 기분이 안 좋았어요. 특히 젊은 유학생들 중에 돈은 필요한데 이 일에 대한 애정 없이 와서 시간만 때우려고 하는 모습을 볼 때 힘들더라고요. 이 일은 두 명씩 짝을 지어서 일을 하거나 그룹으로 일을 하니까 파트너가 이런 자세로 일을 하면 상대 요양보호사가 어려워지죠. 제가 오후 지원을 주로 했는데, 젊은 사람들은 보통 오전에 다른 일들을 한 건 하고 이미 지쳐서 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럼 당연히 피곤하니까 돌봄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젊은 요양보호사도 봤어요. 돌봄은 결국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잖아요. 관계가 중요한 거 같아요.
나중에 돌봄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온다면, 본인은 어떤 고객이 될 거 같으세요?
전 돌봄사들을 힘들게 하지는 않을 거 같아요. 돌봄을 제공하는 일을 오래했잖아요. 돌봄사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잘 알고, 어떤 고객을 좋아하는지도 알고, 돌봄을 정중하게 요구해야 하는 법도 아니까요. 근데 물론 저의 바람이죠. 나중에 제가 어떻게 될지 누가 장담하겠어요? 치매라도 걸려서 정신 없어지면 뭐 어쩌겠어요.
우린 이민자잖아요. 멜번엔 한국식 요양원이 없는데 호주 로컬 요양원에서 음식이나 문화 때문에 어려움은 없을 까요?
개인적으로 호주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전 호주 음식을 다 잘 먹어요. 한국식 먹으면 좋죠. 하지만 전 호주 음식도 큰 어려움은 없을 거 같아요. 요양원 각 방에 냉장고 있으니까 가족이나 지인들이 가끔 한국 음식 사다 주면 거기에 넣고 먹으면 되겠죠.
요양보호사들이 제일 어려워 하는 분들이 치매 환자잖아요. 치매 어르신들도 접해보셨을 텐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인지 능력이 없어져서 전혀 알아보지 못하니까 기가 막히죠. 어떤 분은 아내가 면회 왔는데 엄마 왔다고 좋아라 하고, 아들이 왔는데도 못 알아보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슬프죠. 치매 어르신들은 케어도 어렵죠. 밤에 안자고 계속 돌아다니기도 하고, 가수였던 분은 하루 종일 노래 부르고, 38년 경찰이었던 분은 계속 단속하고 다니고… 기억을 잃고도 평생 해왔던 일들이 잠재적으로기억에 머물다 나오는 거 같아요.
마지막으로 요양원에서 일하시는 동안 가장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요?
요양보호사들이 시간이 없다는 거죠. 어르신들은 외롭고 대화를 하고 싶어 하시는데 요양보호사들은 두 명이서 여러 명을 케어하다 보니 항상 시간에 쫓겨요. 그렇다 보니 개별적으로 충분한 케어를 지원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아요. 또 하나는 어르신들 중에 찾아오는 가족이 거의 없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안 좋죠. 가족이나 지인들이 종종 찾아오는 어르신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시니까요.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는 항상 마음이 더 갔죠. 전 요양원 일이 힘든 면도 있었지만 좋았어요. 이혼하고 나니까 세상에 힘든 일이 어디 있어요? 이혼 (당)했을 때 애는 어리지 수중에 돈은 없지.일하게 하면 감사했죠.
인터뷰를 끝내고 귀가하시는 C의 뒷모습을 눈에 오래 담는다. 내가 직접 담근 김치가 담긴 봉지를 들고 바삐 걸어가신다.
“운동 안 하면 이 일 못해요.”
체력과 건강이 곧 노동의 조건인 요양보호사의 길, 현역일 때 매일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던 그녀는 항상 나에게 말했었다. 그래서인지 아직 복용하는 약이 하나도 없다는 C의 자부심은 근거가 있다. 허리가 꼿꼿하고 발걸음이 젊은 사람처럼 날렵하고 가볍다.
사뿐 사뿐 날개 달고 떠나는 C는 나의 미래에 희망을 불러 일으킨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갈 것이고, 그녀처럼 건강관리에 전념할 것이다. 나도 오십 줄에 들어선 요양보호사이고 체력과 건강이 이 노동의 필수 조건이란 사실을 매일매일 실감하니까.
그리고 멋진 요양보호사 선배C 의 활기 찬 전화를 오랫동안 받으며 살고 싶다.
“샘, 우리 언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