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따위 없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던 산골

가난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가난을 살았다

by 루아나
tempImageo54lPS.heic 멜버른에 등장한 한국 참외




태어나 보니, 부모가 소작농이었다.


부모가 존재했으나 늘 부모가 부재한 유년을 살았다. 가난이 부모를 앗아갔다. 가난한 소작농이던 부모는 늘 밭과 논에 가서 붙어 살았다. 밤이고 낮이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그나마 자식들 목에 거미줄을 치지 않을 수 있었다. 주로 먹고 잘 때만 부모가 있었다.


가난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가난을 살았다.


부모를 앗아간 가난은 나의 유년시절 마저도 박탈했다. 저절로 애 어른이 되어야만 살아지는 나날이었다. 머리와 손이 조금씩 영글면서 부모의 일터를 쫓아다니는 어린 일손이 되었다. 고추밭에, 콩밭에, 땅콩밭에, 모내기와 추수의 시기에 동원되었다. 밥짓기, 빨래하기, 청소하기 등 밖에 동원되지 않으면 엄마가 부재한 집에서 엄마의 살림을 도왔다. 그도 아니면 새참을 담은 넓은 쟁반을 머리에 이고 나르던 엄마 옆에서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다녔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고만고만한 삶이어서 집에 있다고 해서 놀거리나 놀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흑백 텔레비전도 이장 집에나 가야 볼 수 있었다.


“해가 똥구멍까지 치솟았는데 아직도 자빠져 잠만 자?”


지게 바지기에 꼴을 산처럼 베어 짊어지고 온 아빠는 자식들의 게으름을 참지 못했다. 이때 게으름의 기준은 아침 6시이고 새벽에 나가 꼴을 베기 시작한 아빠에게는 6시 기상은 늦잠이었다. 이렇게 게을러 터져서는 남의 집 머슴과 식모살이도 못한다고 화를 내셨다. 산골에서만 사셨던 아빠의 직업 목록에 아들들의 직업은 머슴, 딸들의 직업엔 식모살이 외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던 듯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만드세.”


1970년대는 박정희 정권의 주도 하에 새마을 운동이 불길처럼 타오르던 시대였다. 새마을 운동의 노래가 수시로 울려 퍼지고, 이장은 초록색 바탕에 노란 새싹이 그려진 “새마을 운동 모자”를 쓰고 다녔다. 너도나도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뭐든지 바꾸고 싶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도 진심으로 나의 처지를 바꾸고 싶었다. 산골에서의 유일한 비교 대상은 이장 집 딸 정도였다.


한번 몸에 벤 습은 배신이 없다.


소처럼 우직하게 일만 해야 했던 부모와 근면해야 했던 시대의 덕에 나는 평생을 “새마을 운동의 딸”로 살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서 자취를 할 때도 지각 한번 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혹독했던 가난의 시대 덕이었다. 그 습관은 50이 넘은 지금까지도 아침 6시전에 눈이 반짝 떠지고 발딱 일어나 아침을 먹는 사람으로 살게 했다.


태어나 보니, 내 위로 8명의 오빠와 언니들이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3년 뒤에 남동생이 태어났다. 엄마는 나를 육현이라고 불렀다. 한날 엄마에게 물어보니 특별한 이유는 없고, 여섯 번 째 딸이라서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 아들을 낳기 위해 엄마들이 존재하던 시절, 그래서 딸들의 이름 끝에 “자”가 밥 먹듯이 붙던 시절에 “육자”가 아니라 “육현”이어서 다행이었다.


“집에서는 육현이라고 부르는데 이장님이 좋은 이름으로 지어주세요.”


부모 모두 학교의 문턱을 넘어보지 못한 무학이었기에 출생신고도 동네 이장의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십리 밖에 있는 면사무소에 나의 출생신고를 하러 가는 이장에게 엄마는 부탁을 했고, 이장은 내 이름을 육현이에서 "회정"으로 바꿨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이장이 지어 준 “회정”에서 또 “혜정”으로 바뀌었다. 이름과 생년월일이 파전 뒤집듯 바꾸기 쉬운 시절이기도 했다.


나의 살던 고향에도 철마다 꽃은 피었다.


그러나 나와 가족들은 그 꽃들을 즐길 새가 없었다. 밤잠을 줄이면서 일해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노동과 따박따박 다가오는 끼니 때를 걱정하기도 바쁜 유년이었다. 소작농의 부모, 열명의 자식이 딸린 가정엔 시골살이의 낭만이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없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충청남도 논산군, 그 곳에서도 십리(4킬로미터)의 산길을 걸어가야 닿는 곳에 있었다. 엄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계곡이 아름다워서 마을 이름이 “가곡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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