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자고 음식마저 우리의 사랑을 부추기는지...
“주말에 서울 가는데 같이 밥 먹을래요?”
또 다시 내가 먼저 문자로 말을 걸었다.
대전과 서울을 오가는 만남이었다. 내가 서울을 찾는 날이 더 많았다.
그가 아니어도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해서 서울 나들이를 종종 가던 나였다. 독립영화들이 한국에 자리를 잡아 나가고 큰 도시들에 독립영화 상영관이 하나 둘 들어선 시기였다. 혼자서 대전과 서울의 독립영화관을 종종 드나들었다.
KTX 회원이 됐다.
상업영화들의 가벼움과 소란함, 비현실성, 그리고 빠른 전개를 따라가기 어려웠었다.
유머, 판타지, 영웅물의 책이나 영화가 버거웠다. 해리포터도 끝까지 읽어 본적이 없고,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와 ‘반지의 제왕’을 보는 내내 졸다가 온 적도 있다. 가난을 일상으로 먹고 살았던 산골짜기 출신, 어려서 부터 자본이 개입한 다양한 문화적 경험과 혜택을 누리고 살지 못한 나는 현실적이지 못한 내용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찌든 가난은 나를 세상에 대한 환상과 상상력, 그리고 가벼운 유머들을 참을 수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반면에 독립영화들의 느린 속도와 영웅보다는 찌질해 보이는 그래서 나랑 비슷해 보이는 주인공들을 보는 일이 편했다.
그는 대학원 공부로 바빴고, 뚜벅이 생활을 했었고, 나는 경력 7년차의 교사로 주말과 방학이 자유로웠다.
내가 주로 서울로, 어쩌다 그가 대전에 내려왔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어쩌다 이용하던 KTX 의 이용이 잦아졌다.
“브라질에도 비슷한 음식이 있어.”
보글보글 끓는 부대찌개 앞에서 그가 말했다. 적당히 추운 초겨울 저녁, 대전행 KTX를 타기 전 우리는 서울의 한 놀부부대찌개에서 부대찌개를 먹고 있었다. 부대찌개를 시켜 놓고 한참 부대찌개의 기원을 설명을 하던 참이었다. 원래 부대찌개를 먹을 때, 특히 상대가 외국인일 때면, 부대찌개의 기원을 설명하는 일은 대한민국 국민의 국룰 같은 것이 아닌가?
그는 한국의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고 존중하려고 애쓰는 젊은이였다. 지적 호기심이 넘치는 존재였다. 내가 한국의 역사, 문화, 문학, 음식을 설명할 때마다 그는 쌍거풀이 짙은 큼직한 맑은 눈으로 바라보며 경청했다. 호수 같은 눈, 그 호수에 퐁당 빠지고 싶게 만드는 눈이었다. 이래서 시가 탄생하는 구나 싶었다.
“브라질에도 역사의 슬픔이 베인 부대찌개가 있구나!”
한국의 일제 식민 지배 기간 35년, 그리고 브라질에는 300년이 넘는 포르투갈의 긴 식민 지배 기간이 있었다. 말수가 적어 주로 듣는 쪽이었던 그가 처음으로 말이 트인 아이처럼 말을 쏟아낸 날이기도 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미군 부대 주변에서 먹거나 쓰고 남은 햄, 소시지, 베이컨, 통조림 콩 등을 모아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화를 줘서 탄생한 부대찌개. 이렇게 탄생해서 국민음식이 된 부대찌개가 있다면 브라질에는 페이조아다(Feijoada)가 있다. 페이조아다는 배고픈 노예들이 돼지의 귀, 혀, 꼬리, 족발처럼 주인이 먹지 않고 버리는 부위들을 모아 검은 콩과 소시지, 그리고 베이컨을 넣고 서너 시간 끓여내는 음식이다. 어쩜 이리 재료마저도 유사하단 말인가!
어쩌자고 음식마저 우리의 사랑을 부추기는지...
탄생의 아픔을 가진 부대찌개와 페이조아다, 가슴 아픈 역사에서 시작되어 각각의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잡은 음식들. 그 후 나는 그가 데려간 서울의 한 브라질 음식점에서 페이조아다를 맛봤다. 익숙한 재료들로 끓여낸 부대찌개가 그의 입맛을 단박에 사로잡았다면 페이조아다는 내 혀의 감각들을 깨웠다. 요리를 사랑하는 나였다. 그리고 어렴풋이 기대했다. 앞으로 내 앞에 놓인 남아있는 날들에서 페이조아다를 먹을 일이 종종 있으면 좋겠다고, 페이조아다 요리법을 배워서 그가 고향이 그리울 때 같이 해먹으면 좋겠다고.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들떴다.
‘브라질 현지에서 페이조아다를 먹어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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