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되돌리기 버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애를 할 때는 몰랐다.
살다 보니 어느 것 하나 예민하지 않은 구석이 없는 그였다.
연애는 콩깍지가 씌워지는 일, 사전적 의미로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워하고 사랑하는데 단점이 보일 틈이 있다면 처음부터 “연애”가 성립하지 않았을 게다. 그러니 연애시절, 그러니까 서로 사랑에 빠졌을 때는 그의 예민함을 알았다고 해도, 지금과 똑같은 길을 걸어왔을 게다.
인생에 되돌리기 버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살면서 처음 만난 ‘브라질 사람’이란 점 외에도 여러가지 면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완벽한 사람이었다. 좋은 집안, 연애인 같은 외모, 좋은 학벌, 비상한 뇌, 연하, 안정적인 직업, 선량함과 겸손함, 자상함 등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많은 나,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그의 다름은 뿌리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런 유니콘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어려운데 왜 나를 사랑까지 하지? 감격이었다.
“눈과 코가 너무 예뻐.”
평생 남의 것이기만 했던 문장을 그가 나의 것으로 바꿔놨다. 혼란스러웠다. 농담? 아니면, 브라질에서는 이런 여자들이 미의 기준인가? 의아했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너무나 순수한 그의 눈빛과 표정을 보니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설령 연애 초기라 그의 눈에도 콩깍지가 씌워져 판단력을 잃었다 한들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십대와 이십 대, 작은 눈과 낮은 코는 내 자존감을 팍팍 꺾어 놓기에 충분했는데, 순식간에 가장 빛이 나는 부분으로 격상되었다. 성형수술을 안 한 게 얼마나 다행이야,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의 별남은 미의 기준까지도 뻗치나 보다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결혼 생활 내내 나의 눈과 코가 예쁘다고 했다. 대전과 서울을 오가는 장거리 연애 2년, 장거리 신혼생활 2년, 우리의 결혼생활은 안전하고 평탄했다. 앞으로 뻥뻥 뚫린 고속도로만 펼쳐지는 듯했다. 거침없이 전진만 하면 될 듯했다.
“꼭 우리가 낳은 아이가 아니라도 좋아.”
그는 완벽이란 단어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결혼 후 2년이 다 되어가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초조했다. 그보다 7살이 많은 나였다. 남편을 닮은 아이가 탐이 났다. 그가 훌륭한 아빠가 될 거란 사실에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의문도 없었다. 결국 둘이서 입양을 고려하고 있을 때 기적처럼 아들이 우리에게 왔다.
아들이 태어날 때쯤 그가 다니던 대기업에 사표를 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 만났을 때부터 이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그가 금쪽보다 귀한 아들을 놓고 일터로 나갈 수는 없는 터였다. 일년 동안의 경제적 부담은 부자간의 돈독한 사랑이 대체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더불어 마침내 우리 부부의 한 집 살이가 시작됐다. 엄마와 아빠가 적극적으로 달려 든 일손이 남아도는 별난 육아가 시작되었다. 건강을 자신할 수 없는 저질 체력이라서 임신을 안 순간부터 이미 긴 육아휴직을 각오한 엄마와 24시간 아들 바라기를 하는 아빠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와 아빠의 부재를 한 순간도 경험하지 못한 드문 애가 태어났다.
초보 엄마와 아빠의 24시간 공동육아가 시작되었다.
아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예민했다.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씻기는 것도 하루하루 전쟁이 따로 없었고, 수시로 울고 징징댔다. 육아 초보인 그와 내가 달라붙어 하루 종일 종종거려도 아들의 비위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수시로 발악하며 울어대는 아들을 보면서 오죽하면 뭔 큰 병이라도 났나 싶어서 응급실도 몇 번 다녀왔다.
아들은 불안을 몰고 우리에게로 왔다.
불안이 극대화 된 그와 나의 의견이 양육에서 수시로 엇갈리기 시작했다. 연애시절과 신혼 초의 기꺼이 용납되던 차이들이 아들이 태어나면서 부터는 일상의 방해물이 되기 시작했다. 그도 나도 바뀐게 없었는데, 상황과 환경이 바뀌자 그의 장점들이 단점들로 하나둘씩 탈바꿈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세련된 도련님 이미지는 극도로 까다롭고 예민함으로 다가 왔다. 아들의 까다롭고 예민함이 그의 것이란 것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열명의 자식을 키워낸 나의 엄마도 아들 앞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자식 열명은 키웠어도 네 아들 한 명은 못 키우겠다."
그토록 탐내던 그를 닮은 아이가 왔으니 원망이나 비통 따위는 없었다. 그저 그를 사랑했듯 아들도 사랑만했다. 그의 총명함과 명석함은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기능들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계란 후라이 하나를 변변하게 요리하지 못하던 그에게 먹는 일까지 까다롭고 예민하던 아들의 이유식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는 이유식 만드는 법을 공부하기 전에 조리 기구와 조리 도구 검색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내성적이고 조용함은 사회적 관계 맺기의 어려움과 그 어려움의 불안에서 기인한 것이란 걸 알아챘다. 그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서너명만 있는 곳에 가면 바짝 긴장을 해서 주변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가 되곤 했다. 그런 남편과 맞춰 살다 보니 나도 점점 관계가 협소해지고 사람 만나는 일이 어려워졌다. 남편과 아빠로서의 자상함과 충직함은 완벽주의와 강박으로 나를 옥죄여왔다. 내가 하는 일들은 요리 빼고는 대체로 그의 기준에 충족되지 않았다. 시어머니 잔소리가 아니라 남편의 눈치를 보고 사는 여자로 등극했다. 그는 중간지대를 벗어난 극단에 살았고, 나는 중간지대를 사는 여자였다.
우리 둘은 서로가 닿지 않는 다른 지대에 살았다.
중간지대가 없다는 말은 타협이 어렵다는 말의 다른 이름이다. 타협이 어렵다는 말은 타인의 의견에 융통성 있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일이 어렵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결과적으로 그와 다른 내 의견을 그가 이해하게 만들려면 흑과 백만의 세계에 존재하는 그를 끌어내서 그 둘 사이에는 수많은 경우수와 선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야만 했다. 그런데 그 일은 너무나 오래 걸리고,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고, 그럼에도 합의보다는 실패가 잦았다. 그 말은 강한 그의 주장과 선명한 취향을 존중해야 아무일 없는 가정이 유지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종종 친한 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있었다.
“그의 고집을 꺾느니 내가 에베레스트산을 파서 옮기는 게 쉬울 거야.”
그렇게 결혼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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