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나는 일이 인생의 목표였던 딸
“딸년들을 뭐 하러 교육을 시켜. 집안일이나 잘 가르쳐서 시집이나 보내면 되지.”
농번기에 종종 듣는 소리였다.
아빠는 이런 말을 딸들 앞에서 거침없이 내뱉곤 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아무말 대잔치를 해도 되는 그런 시절이었다. 나의 아빠만이 아니라 옆집이고 건너 집이고 흔하게 담장을 넘는 소리들이었다. 그나마 열 남매 중 이런 말을 듣고 산 자식들은 복이 있는 편이었다. 없던 운에 더 없는 불운이 더해져 먼저 태어난 언니와 오빠들은 식모살이, 방직공장, 양조장, 그리고 화물차 운전을 한다고 어릴 때 집을 떠났다. 다시 말하면 집의 밥숟가락을 줄이기 위해 국민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떠났다.
“먹고 살려면 뭐라도 해야지.”
농한기에 나의 부모는 화전민을 기꺼이 자처했다. 집에서 30여분을 걸어야만 닿는 산속에 나무를 베고 뿌리가 마르면 뿌리를 뽑고 돌을 골랐다. 물론 딸인 나도 종종 동원이 되어 부모가 뽑은 나무 뿌리를 나르고 감당할 수 있는 돌들을 골라 날랐다. 그리고 그 거친 땅에 콩을 심었다. 시골에서는 자식이 대체 일손이었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나는 아홉 번 째 자식이었다.
산 너머의 알지 못하는 세상의 변화가 내가 살던 산골 벽지에도 알게 모르게 들어오고 있었다. 딸들의 가방 끈이 조금씩 더 길어지기 시작했다. 원래 말리면 더 하고 싶다는 말이 진리인 듯 늦게 태어난 딸들은 공부에 매달렸다. 학교 가는 시간이 제일 좋았고 집에 있는 방학이 제일 싫었다. 학교에 가면 노동이 없었고 대신 친구들이 있었다.
“내일 다들 학교는 못 갈 줄 알아!”
유일한 농사 도우미가 소이던 시절, 그러니까 몸으로 고된 농사일을 다 해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일손 하나 하나가 아쉬운 시절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빠는 농번기, 가령 모내기 날이나 벼를 수확하는 날에는 딸들에게 등교 금지를 내렸다. 딸들은 아빠의 말씀에 조용히 순종하는 자, 그리고 말대꾸 하는 반항하는 자로 갈라졌다. 그리고 막내딸인 나는 후자였고 종종 대들고 따졌다. 물론 무서운 아빠가 아닌 만만한 엄마에게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비겁했지만, 그때는 생존이었다.
“가르치지도 못할 거면서 왜 낳았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엄마가 중간에서 양쪽의 심기를 살피느라 안절부절이었다. 엄마가 찾아낸 해결책은 학교를 못 간 딸들이 해야할 몫마저 본인의 노동으로 채워 넣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새벽 달빛 밑에서 일을 하는 게 예삿일이 되었다. 그렇게 아빠의 심기를 살피면서 아빠 몰래 딸들을 학교로 보냈다. 앞에 태어난 언니 오빠들은 누려보지도 못한 호강인데도, 나는 학교를 가면서도 화가 났다.
아빠 돌아오면 난리 난다, 일찍 논으로 나간 아빠가 아침 드시러 돌아오는지 문밖을 살피며 딸들을 학교 가라며 밀어내던 엄마를 보면 정확히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뭔지 모르게 미안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존재 자체가 부모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란 걸 어릴 때 깨달았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네 아빠는 다른 집 아빠들처럼 때리지는 않잖아.”
종종 화가 나서 씩씩대는 나에게 엄마는 말했다. 화를 풀 곳이 엄마 밖에 없었다. 이런 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는 건지, 때리지만 않으면 괜찮은 아빠에 속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냥 내던 화를 계속 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고작 국민학교 학생이었다.
본캐가 소작농, 부캐가 화전민인 부모 밑에서 자란 나의 소원은 하나였다. 고향을 하루 빨리 떠나는 일, 그리고 공부가 그 유일한 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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