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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경 Apr 24. 2024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눈이 큰 소녀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새벽부터 내린 눈은 아침이 되어서도 점심이 되어서도 그칠 줄 몰랐다. 늦은 점심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는데 버스가 다닐지 모르겠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은 종종 버스 운행이 중단되곤 했었다. 몬트리올에 와서 익숙해지지 않은 현상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눈이 많이 오면 걸어 다닌다. 몇 정거장이고 상관없이 계속 걷는다. 처음에는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는 것에 화가 났고 눈이 오면 오는 대로 치우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눈이 많이 오는 데다 자주 오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는 것 같았다. 오래 살다 보니 나 역시 화도 안 나고 이해가 가지 않던 부분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 눈이 오는 날은 약속이 있으면 한 시간 더 일찍 나서면 되지. 오늘도 한 시간 더 일찍 나셨다. 약속 시각에 겨우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다. 장갑을 벗고 목도리를 벗고 모자를 벗고 외투를 정리하는 데까지 정확히 4분이 걸렸다. 아직 J는 도착하지 않았다. 오늘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날이다. J 하고 나. 이 프로젝트를 과연 시작해도 되는지 얘기해야 한다. 영어로도 불어로도 한국말로도 서로를 백 퍼센트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나와 의견교환이 가장 잘 되는 친구이자 동료이며 역시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작품을 누구보다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 중 한 명이다. 이번에 함께 프로젝트를 하기로 하고 기뻤지만, 한편으로 걱정도 되었다. 과연 서로의 생각을 백 프로 이백 퍼센트 이해할 수 있을까. 오늘은 그 이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만나자고 했는데 눈이 많이 와서 아직 J는 도착하지 않고 있다. 연락도 되지 않는다. 이대로 괜찮을까.    

  

교실에 한국 사람은 없었다. 몇몇 외국인들이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면 덜 어색할 텐데 아직 10분이나 남았다. 선생님은 누구실까. 언제쯤 오실까. 10분 전에는 교실에 도착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하고 있는 데 교실 문이 열리고 한 명의 학생이 들어왔다.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코까지 덮어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손으로 내 옆의 의자를 가리키며 눈짓을 보냈는데 여기 앉아도 되는지를 묻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 앉아 모자를 벗고 목도리를 벗고 마지막으로 장갑을 벗었다. 가방 안에 장갑, 목도리, 모자 순서대로 차곡차곡 넣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살짝 웃어 보였다. 눈이 크고 얼굴이 작은 여자아이였다. 나보다는 10살 정도 어려 보이는. 말을 걸어볼까 했는데 수업이 시작되고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눈치로 한 시간 수업을 끝내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1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화장실을 다녀오면 시간이 지나가겠지. 화장실엔 내 앞, 뒤, 옆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이미 다 와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것일까. 그래 처음은 다 그런 거야. 내일은 한마디라도 할 수 있겠지. 대체 영어 시간에 말하는 방법은 왜 안 알려준 걸까. 알려주셨는데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등 하찮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옆자리 눈이 큰 여학생도 있었다. 손을 씻는데 옆으로 와서 하이. 한다. 어색하게 하이. 하고 교실로 재빨리 돌아오려고 하는데. 커피?라고 묻는다. 커피를 마시자는 얘기일까. 부자연스럽게 끄덕인 고개가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아. 어쩌지. 하이 다음 대화는 어떻게 해야 할까. 커피 자판기로 가는 몇 걸음 동안 수많은 생각을 했다. 여학생은 자신은 이라크에서 왔고 가족이 모두 이민을 왔으며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걱정이라는 것을 영어로 유창하게 말했다. 수년간 단련된 리스닝 스킬로 알아듣긴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아 더듬더듬 내 소개를 하는데 쉬는 시간이 끝나버렸다. 교실로 돌아와 오후 수업을 마칠 때까지 그녀와 나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어쩐지 내일 다시 서로 옆자리에 앉을 것만 같은 예감을 가지고 헤어졌다. 목이 탄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피곤하다. 하이네켄을 마시며 이라크... 가족…. 되뇌어 본다. 전쟁이 한창인 곳이 아닌가. 어떻게 이곳까지 온 것이지? 영어를 잘할 수 있다면…. 맥주를 마시며 전쟁…. 워…. 어떻게…. 하우…. 문장을 만들어보다 창밖을 보니 또. 눈이 내린다.   

   

아침에 라디오를 켜고 뉴스를 듣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아침의 라디오라니. 고3 이후로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공부에 도움 될까 하고 그저 틀어놓았는데 이제 조금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들이 조금씩 늘어난다. 매일 달라지는 날씨에 안절부절못하다 티브이는 아직 살 형편이 안되어 알람시계와 라디오가 같이 되는 신기한 물건을 샀다. 라디오에서는 매시간 날씨를 알려주었다. 이렇게 친절하게 날씨를 자주 알려주는지 몰랐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달라지는 날씨 때문에 꼭 들어야 한다고 집주인이 얘기해 주었을 때도 날씨가 뭐 얼마나 바뀐다고 라디오씩이나 들어야 할까 했는데 눈뜨자마자 알람을 라디오로 설정해 놓기에 이르렀다.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눈이 온다고 한다. 양말을 한 개 더 챙길까 하고 뒤적이는데 삐삐가 울렸다. 어제 그 눈이 큰 여학생이다.  메시지를 들어보니 오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수업에 못 갈 것 같다고 혹시 시간이 되면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올 수 있냐고 한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흠칫 놀라 못 간다고 할까 하다가 예스.라고 하고 말았다. 수업시간 내내 끝나고 어떻게 찾아갈지 찾아가서는 무슨 말을 할지 방문할 때는 무엇을 사갈지 도무지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드디어 평소보다 긴 수업시간이 끝나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오래 걸어 그 친구의 집에 도착했다. 지하철역에서 산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그 여학생의 집은 여기 도착한 후 처음 본 굉장히 럭셔리한 아파트였다. 입구에서부터 벨을 눌러야 했고 그 문을 열면 또 문이 있고 아무튼 세 개의 문을 통과해서 엘리베이터에 도착했다. 벌써 너무나 피곤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을 누르자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가 원래 이렇게 빠른 이동수단이었나. 문이 열리자 바로 집안이었다. 이렇게 신기한 구조는 처음이라 괜히 손에 땀이 났다. 눈이 큰 여학생은 손을 흔들며 하이.라고 했다. 옆에는 어머니처럼 보이는 분이 웰컴이라고 했다. 고개를 숙이며 손을 조금 들어 하이라고 했다. 아. 어색한 인사법이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다. 장미꽃을 건네자 땡큐 하며 까르르 웃는 여학생이 인제 보니 굉장히 어려 보인다. 신발을 벗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했는데 슬리퍼를 권한다. 양말이 너무 화려해서 창피했지만 이미 신발은 벗겨졌고 내 양말보다 더 화려한 슬리퍼 안으로 발을 집어넣고 있었다. 나는 화려한 양말이 좋다. 양말을 파는 트럭을 만나면 꼭 저 밑에서 꺼내 가장 화려한 양말을 한 켤레 산다. 그 양말을 신으면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내 그런 양말보다 더 화려한 슬리퍼라니. 겸손해진다. 복도를 따라 들어가니 넓게 펼쳐진 응접실이 나온다. 말 그대로 응접실이다. 자고로 응접실이란 이런 것이지 싶은 그런 곳에 둥그런 식탁이 있고 중앙에는 긴 촛대가 있었다. 장발장 영화에서 본 것 같은데 실제로 저런 촛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동안 앉으면 뒤에서 머리가 보이지 않는 등받이가 긴 의자에 앉았다. 커피?라고 여학생의 어머님이 물어보아 예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내온 커피는 생전 처음 보는 주전자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잔에 쪼르륵 따라주는 진한 커피였다. 터키식 커피라고 했다. 정말 처음 보는 주전자였고 처음 보는 작은 커피잔이었으며 처음 보는 진한 검은 물이었다. 설탕을 넣겠냐고 물어서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예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이 집에 온 이후로 예스 말고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둥근 식탁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앉으면 뒤에서 머리가 보이지 않는 등받이가 긴 의자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내 양말보다 화려한 슬리퍼 때문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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