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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일 Aug 03. 2021

다시 용기를 내기 위하여

누군가 내게 페미니스트냐고 물어온다면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겁쟁이 사자의 결말을 아는가? 용기를 가지고 싶어 도로시와 함께 머나먼 길을 떠났던 그 사자의 마지막 말이다. 참 이상하게도 <오즈의 마법사>는 알아도, 그 동화에 사자가 나온다는 것은 알아도, 그 사자가 마침내 용기를 갖게 됐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CCTV 녹화, 하실 건가요?”

나는 당황스런 얼굴로 변호사를 쳐다봤다.

“이거 읽어보시고 여기에 서명하세요.”

피고소인 어쩌고로 시작하는 문서였다. 앞줄을 읽자마자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누구고, 또 여긴 어디인가. 나는 갑자기 피고소인이 되어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왔다. 몇 가지 확인만 할 것이라는 형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채로 질문에 답변을 하는 내내 생각했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나를 이 자리까지 데리고 온 것은 과연 뭐였을까. 나는 왜 그 일을 선택했던 걸까. 나는 침묵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누구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에게 당당해지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비겁한” 나였다.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 나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 나는 그 자리에 앉았다.


“출연하시는 분들이 진짜 용기 내신 거죠. 얼굴 공개하고 나오는 거니까.”

“어, 맞아요.”

나는 또 몇 대의 카메라 앞에 앉아 있었다. 호스트는 내게 물었다. 신청서를 내신 이유가 있으세요. 나는 또 생각했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뭐였는지. 필름이 되감겼다. 나의 20대, 그 숨 막히고 어두웠던 시간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아무도 보여주지 않아서 도대체 어떻게 가야하는지 알지 못했던 그 깜깜했던 터널의 입구를. 이제 좀 끝이 보이는 출구에 다다라서야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그 안에 갇혀있을지 모르는 많은 여성들을 생각했다. 그냥 말해주고 싶었어요. 인생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20대의 대부분을 실패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그 값을 치루느라 늘 허덕였던 나에게, 나는 다시 말하고 있었다. 힘든 것도 결국에는 지나간다는 상투적인 위로가 아니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시간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는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고. 그래도 된다고. 나는 그 말을 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 뉴스에서 청년의 실업률, 그리고 그 중에서도 20대 여성의 실업률이 가장 높다는 사실과 그 뒤를 이은 20대 여성의 자살률이 해마다 최고치를 갱신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두려웠다. 이대로 또 아무것도 하지 못할까봐. 내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한치 앞을 모른 채로 나는 카메라 앞에 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이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비겁한 내가 다시 불러올지도 모르는 미래의 어두운 그림자를 그렇게 밀어내버렸다.


“근데 너도 페미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지?”

누가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는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까. 참 이상하게도 남성과 여성이 성별을 이유로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너무나도 명징한 명제와, 페미니즘, 그리고 페미니스트 이 셋의 거리는 생각보다 아주 아득했다. 이를 테면 1단계에 동의하면 2단계로 나아가고, 2단계에 동의하면 3단계로 가는 건데, 2단계에서 3단계로 가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맞을까? 여성이 성별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건 너무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었다. 그 사이에는 아주 촘촘하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가기로 결심하며 내가 했던 생각은 하나였다. 더는 비겁해지지 말자. 나에게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세상의 편견, 불평등, 불편함, 너무도 당연하게 작용하는 관성의 권력들을 더 이상 모른척할 수는 없었다. 더 이상의 퇴로가 없는 곳까지 계속 뒷걸음을 치다가 벽에 등이 부딪히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제 돌아가는 길은 없어. 나는 그제서야 내가 갈 수 있는, 내가 가야하는 길을 똑바로 보았다.


여기까지 쓰고 급하게 네이버에 “오즈의 마법사 줄거리”를 검색해 보았다. 찾아보니 오즈의 마법사가 마법을 부린 것은 결국 거짓이었는데, 사자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는 결말이다. 결국 원래부터 사자에게 용기가 있었던 것이란다.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게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게 자기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이 모든 과정 자체가 용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겁을 잔뜩 집어먹고서도 내가 겪은 일에 대해 또박또박 이야기 하는 것, 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나의 자리에서 나의 말을 하는 것. 용기가 있어서 용기를 내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용기는 아닐까. 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모든 순간에 용기를 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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