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은 실수를 증명한다
탄생이라는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서
어느 유명한 대학 교수의 임용 연주회에 갔을 때였다. 바이올리니스트로 정평이 나 있는 젊은 남자 교수였다. 교수는 비장한 표정으로 무대에 올랐고, 핀조명이 떨어지고 정적이 얼마간 흐른 뒤 연주가 시작되었다. 교수의 표정만큼 비장한 음악이었다. 시작부터 기깔나는 바이올린 솔로로 화려하게 막을 여는 듯 했다. 그런데 웬걸. 얼마가지 않아 아주 치명적인 삑사리가 났다. 클래식 문외한인 나조차 눈치를 챌 정도의 엄청난 실수였다. 방지턱 같은 몇 개의 파열음이 지나가고 교수는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는 듯 했다. 실수는 단 한번이었고, 이어지는 연주는 실수를 만회할 만큼, 아니 만회하고 남을 만큼 훌륭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단 몇 개의 파열음이 잊혀지지 않는 것이었다. 신기한 건, 그 교수가 자신의 초반 실수를 만회하려 애를 쓰면 쓸수록 삑사리는 더 강렬하게 그 존재를 각인시켰다.
교수의 피땀눈물이 어린 뒷수습으로 공연은 무사히 끝났고, 나는 그 삑사리의 순간을 계속 곱씹으며 집에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것은 초반에 저지른 실수 때문에 남은 인생 전체를 그 실수를 수습하는 데 쓰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의 존재 자체가 실수였다고 생각했고, 기분 나쁜 우연들이 끈질기게 이어 붙은 결과로 태어나게 되었다. 결국 나에게 인생이라는 것은 탄생이라는 큰 ‘삑사리’ 때문에 나머지의 것들을 애써 감당해야 하는 과정과도 같았다. 혹은, 내가 태어난 것이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이미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일이 일어나버린 후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저지른 실수를 수습하려 애를 쓰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늘 수습은 실수를 더욱 선명하게 증명할 뿐이다. 교수의 후반 연주가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초반의 실수를 더 강하게 상기시켰던 것처럼.
세상에 완벽한 예방이나 대책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오히려 완벽하게 대비했다고 생각할수록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수습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하곤 한다. 일에서도 그렇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나의 깨달음은 현실보다 늘 한 발짝 늦다. 가끔은 ‘될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팽개쳐 버리고 싶을 때가 잦다. 수습하려 애를 쓸수록 나아지기는커녕 현상유지조차 힘들다. 태어난 죗값을 대체 어디까지 치러야하는 걸까.
가끔 다시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그 공연장에 혼자 앉아 있다. 핀 조명아래 진땀 흘리며 연주를 이어가는 교수의 뒷모습이 보이다가 다시 앵글이 바뀌면, 어느새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사람은 내가 되어있다. 꿈속에서처럼, 어쩌면 나는 지금도, 의연한 척하면서, 마치 없었던 실수라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이미 시작되어버려 중단할 수 없는 삶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거겠지. 속으로 ‘아, 좆됐다’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