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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슥슥 Sep 03. 2023

야밤에 노트를 펼친 이유



11시 09분. 아침이 아니라 밤 11시가 되어서야 모닝페이지 노트를 펼쳤다. 게/을/렀/다. 지난 며칠간, 글쓰기에서만큼은 딱 저 네 글자 그대로였다. 내 일상에서 쓰기는 어느새 저 멀리 후순위로 밀려 하기 싫은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모닝페이지도 며칠을 거르다 밤 11시에 펼치는 날이 오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내 게으름에 대한 자책이 아니다. 이 시간이면 ‘에이 모르겠다’하고 퍼질러 잘 수도 있는데 기어코 야밤에 노트를 펼쳤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만큼 쓰고 싶은 말이 있다는 의미니까. 





일기는 쓰지 못해도 다이어리에 그날 있었던 일만큼은 거르지 않고 메모해 두는데, 그걸 쓰다 오늘이 꽤 즐거운 휴일이었다는 걸 자각했다. 시작부터 매우 한가로웠다. 엄마 생신이었던 어젯밤, 가족들과 고기와 와인을 두둑이 먹은 덕에 느지막이 일어나 숙면의 상쾌함을 누렸고, 비슷하게 얼굴이 부은 어제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식탁의 똑같은 자리에 앉았을 땐 햇빛에 살짝 익은 산들바람이 불어와 기분이 좋았다. 막 만든 장조림에 밥을 비벼 먹으면서는 눈앞에 노른자처럼 몸이 풀어지는 감각을 느끼기도 했다.    






오후에는 남동생과 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에 대해 한참 수다를 떨었고(곧 구매할 계획), 배를 두들기며 한바탕 늘어져 있다가 오빠의 제안으로 대뜸 청계천을 가게 되었다. 목적은 뜬금없게도 펌프 구매였다. 며칠 전부터 큰 소리가 나던 배수관을 오빠가 직접 고쳐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가는 김에 자취 집에 떨궈달라 말하려고 나 또한 냉큼 차에 올라탔고 동생은 수리로 고생할 오빠를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게 삼 남매의 뜬금없는 드라이브가 시작되었다. 






웨스트라이프의 마이 러브를 열창하며 어느새 도착한 세운 상가 부근. 거기를 돌아다니다 불쑥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곳은 출판 디자인 학원 수업이 한창일 때 점심시간마다 산책하던 거리였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엔 목적지도 모르고 터널 속을 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목적지는 모호해도 무사히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은 기업이더라도 완전히 새로운 직함으로 일을 하게 되니 조금씩 실감이 난다. 내가 드디어 어느 길목에 들어섰다는 것을. 아직은 가는 곳마다 낯선 풍경이지만 이제는 적어도 터널 속 같지는 않다. 더 이상 주변이 깜깜하지 않다. 그저 어디론가 나아간 기분이 든다. 

오래 일한 업계를 떠나면 쥐고 있던 모든 것을 잃고 헤매기만 할까 두려웠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닫는 사실은 다름 아닌 이것이다. 새로운 길목에는 그저 색다른 풍경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혼자 걸었던 거리를 셋이 걸은 뒤 무사히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내 주변엔 미묘한 온기가 남아있는 상태다. 그건 오빠의 차 안에서 흐른 노랫소리이기도 하고 집 근처에서 삼 남매가 먹은 보쌈의 고소한 향기이기도 하며, 나의 일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예감이기도 하다. 뭐가 되었든 따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내일이 궁금해진다. 앞으로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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