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튼 오늘이 여성의 날 이래.
피씨 카톡으로 친척 언니와 소소한 대화를 이어가다 언니가 불쑥 이 말을 내게 전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나 싶긴 했으나 사실 알고 있었다. 매일 보는 뉴스레터(뉴닉)에서 여성의 날 특집 기사를 계속해서 전달하고 있었으니까.
“으응, 알고 있지.”
‘오늘 비 온대’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다소 무감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언니가 좀 더 긴 문장을 내게 보내왔다.
“근데 우리나라만 약간 조용한 듯. 이따가 집에 갈 때 장미꽃 한 송이 사 가지고 가야겠어”
예상하지 못한 답신에 잠시 텀을 두고 이렇게 되물었다. 자기 자신에게 장미를 선물하는 거냐고.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수많은 ㅋ들과 이 말이었다.
“아니, 엄마한테 주려고 ㅋㅋ”
내가 묻고도 참 바보 같았지만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또 아둔한 대답을 늘어놓고 말았다.
“이모가 좋아하겠네.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과일을 사가야 하나”
부끄럽게도 그때까지 난 여성의 날과 장미의 연관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잘 정제된 기획 기사를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읽었음에도 장미가 사랑과 존경의 징표로서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꽃이란 사실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과일을 운운하며 언니의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한 나는 결국 이런 걱정을 하며 퇴근을 했다. 요즘 과일 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는데 어느 것을 사가야 하나 고민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나는 집 앞 마트에서 전년에 비해 40%가 넘게 오른 사과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 궁리하던 나를 멈추게 한 건 때마침 받은 카톡 메시지였다. 어플을 열자 하얀 포장지에 예쁘게 감싸져 있는 빨간 장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모에게 선물하기 위해 언니가 고른 장미였다. 딱 한 송이였지만, 빛깔이 참 영롱했다. 그걸 멍하니 구경하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마트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꽃집으로 향했다. 오늘만큼은 쓸모를 최우선으로 두던 나의 구매기준에서 벗어나도 괜찮을 것 같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꽃집은 이미 세 명의 대기 인원이 있었다. 모두 허름한 옷차림을 한 외국인 남성들이었다. 꽃집 사장님은 그들이 주문한 장미 꽃다발을 바쁜 손놀림으로 매만지고 있는 중이었다. 십 여분을 기다린 끝에야 나는 사장님과 마주해 제대로 된 말을 붙일 수 있었다. 여성의 날 기념으로 엄마에게 장미 한 송이를 선물하려 한다니까 사장님은 환하게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손님은 처음이시네요! 실은 오늘 아침부터 외국 남자 손님들만 오셨어요. 하나 같이 장미를 사셨고요, 물어보니 ‘여자의 날’이라고 하더군요. 외국에선 이 날을 꼭 기념하나 봐요.”
순간 카톡으로 나눴던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나라만 조용하다던 그 말이. 그러면서 내 얼굴도 같이 화끈거렸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날과 장미를 연결하지 못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나와는 다르게 내 옆을 스치며 매장을 나간 남성의 얼굴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밝았다. 마치 그들 손에 있던 장미꽃처럼 말이다. 아마 그걸 건네받을 누군가를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연분홍빛의 장미를 건네받았다. 장미의 옆에는 서비스로 넣어주신 노란 프리지어 두 송이도 함께였다. 본능적으로 그것들에 코를 갖다 대었다. 놀라울 정도로 향긋했다. 근사한 향기에 굳어있던 내 얼굴이 금세 풀어질 만큼. 예상컨대 그때의 내 표정은 앞서 나간 세 명의 남자들과 꽤 닮아있지 않았을까?
계산을 하고 매장을 나왔는데도 그 작은 꽃다발은 나의 시선을 연거푸 훔쳤다. '예뻐서'이기도 했고, '설레서'이기도 했다. 심장 아래를 누가 미세하게 간지럽히는 것처럼 입꼬리가 계속 올라갔다.
꽃집에서 본가까지의 거리는 겨우 5분 남짓.
현관문을 열기 직전까지 나는 한 가지 다짐만을 속으로 되뇌었던 것 같다.
앞으로 매년 3월 8일은 사랑하는 여성에게 장미를 꼭 선물하자고 말이다.
엄마가 애정하는 다육이 사이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한 장미 한 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