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다행이다
3월부터 7월까지, 약 5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수료증을 받던 날, 가장 크게 밀려온 감정은 뜻밖에도 '안도감'이었다. 처음에는 중도 포기 없이 완주했기 때문에 홀가분한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곧 깨달았다. 사실 나는, 학원 수업을 통해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완성했다는 사실에 더 크게 안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취업 준비에서 입사지원서 작성은 나에게 언제나 가장 끼우기 어려운 첫 단추였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 순간에야 간신히 맞추곤 했던 첫 단추. 직무를 바꿔보겠다고 다짐하며 퇴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실적 자료나 보고서 정도만 백업해 두었을 뿐, 정작 가장 중요한 구직 서류는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가 등록한 과정에는 이력서와 자개소개서 첨삭 시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가장 어렵고 번거로운 첫 단추를 예상보다 빨리 끼울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첨삭일을 일주일 앞두고 학원에서 받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빈 양식을 앞에 두는 순간, 흡사 창작 앞에서 괴로워하는 예술가가 되고 말았으니까. 과장이 아니라, 그때 나는 머리카락을 연신 쥐어뜯고 있었다. 비전공자, 36살의 나이, 디자인과 무관한 9년 간의 홈쇼핑 경력. 대체 이걸 어떻게 자연스럽게 디자이너 취업과 연결한단 말인가. 정말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거대한 실타래를 앞에 두고 끙끙 앓으며 회피하다가, 결국 제출일 이틀 전에 부랴부랴 다시 책상에 앉았다. 더는 미룰 수도, 피할 수도 없던 순간이었다. 벼랑 끝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치 고양이를 피하다 막다른 벽에 몰린 생쥐처럼 별안간 당돌한 용기를 내게 되었다. 숨길 수도 없고, 숨길 필요도 없는 사실을 오히려 전면에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
꼬박 이틀을 투자해 완성한 자기소개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부디 저의 수상한 이력에 놀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채용담당자가 내 이력서를 보는 순간 느낄 의아함과 황당함을 그대로 인정하며 쓴 문구였으나, 사실은 내 서류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기를 바라는 전략도 담겨 있었다. '얜 뭐지?' 하는 마음으로라도 클릭해 보기를 바랐으니까. 그 뒤로는 내가 왜 이런 무모한 전직을 결정했는지를 덧붙였다. 전향을 꿈꾸며 읽었던 책들, 영업인 시절 보고서를 작성하며 시각적인 표현에 공을 들였던 경험, 그리고 주말 수업을 들으며 디자인 분야를 탐색했던 과정까지. 이것들이 내가 생각한 근거였다.
다행히 자기소개서에 담은 경험담이 억지스럽지는 않았는지 학원 첨삭은 큰 수정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쓸 때만 해도 '왜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이렇게 애써야 하나' 반발심이 들었는데, 막상 완성하고 나니 포트폴리오를 정리했을 때보다 더 큰 후련함이 들기도 했다. 비록 구직을 위한 글쓰기였지만, 아마도 혼란스러웠던 과거를 문장으로 정리하면서 막연했던 생각에 질서를 부여하자, 꼬였던 매듭을 푼 듯한 후련함이 들었던 것 같다.
첫 단추를 무사히 끼운 덕분이었을까? 신기하게도 회사에 지원하는 일 자체는 큰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반감보다는 오히려 궁금증이 더 컸다. 내가 정말 디자이너로 일을 할 수 있을까? 디자이너 면접에서는 무슨 질문을 할까? 작업 의뢰는 어떤 방식으로 들어올까?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 무엇보다 회사에는 적응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올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다른 회사에서의 직무 경험까지 합하면 도합 10년간 회사생활을 했음에도, 그 시점의 나는 신입 사원이 할 법한 질문과 걱정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어 하루 10군데 이상을 지원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서류를 제출한 채용 공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회사나 기관의 홍보 인쇄물을 디자인하는 '편집디자인', 다른 하나는 책의 표지와 내지를 담당하는 '북디자인'. 작업물의 성격만 놓고 보면 나는 자연스럽게 후자에 더 끌렸다. 책을 애정하는 독자로서 출판계에서 실무자로 일한다는 상상만으로도 꿈을 이룬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4개월 동안 일러스트 앞에서 고군분투하며 알게 된 건 뜻밖에도 이것이었다. 기대만큼 북디자인에 매료되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리플렛이나 브로슈어처럼 정보를 전달하는 디자인을 더 자연스럽게 해냈다는 것. 결국, 내가 지원한 방향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바라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먼저 다가오는 기회부터 잡아보자고 마음먹었으니까.
다행히 지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면접 제안을 받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같은 날 두 곳에서 연락이 왔다. 한 곳은 조명기기를 제조ㆍ판매하는 기업이었고, 다른 한 곳은 제휴사의 홍보물을 디자인ㆍ인쇄하는 기업이었다.
서로 전혀 다른 업종의 회사 이름을 다이어리에 적으며 새삼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무직은 한 번 발을 들이면 주로 같은 업계에서 커리어가 이어지지만, 디자이너라는 직무는 업계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본격적인 실무를 아직 겪어보지 않아 확신할 순 없었지만, 어쩐지 다른 세상으로 이동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업계에 대한 깊은 지식과 오래 쌓은 네트워크가 가장 큰 무기가 되던 세상에 있다가, 폭넓은 경험이 오히려 강점으로 인정받는 세계로 진입하는 기분. 그 낯선 전환이 이상할 만큼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디자이너가 될 생각을 했나요?
조명 회사에서 본 면접의 시작은 짐작했던 그대로였다. 왜 디자이너란 직무를, 그것도 30대 중반이 넘어 선택했느냐는 물음이 가장 먼저 들려왔으니 말이다. 다행히 예상했던 질문이었고, 머리카락을 연신 뜯어가며 자기소개서에 다듬었던 내용이라 준비한 답변을 비교적 수월하게 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면접관들이 내 이야기에 충분히 납득할지 걱정스러웠다.
의외로 직무 전환에 대한 추가 질문은 많지 않았다. 대신, 이전 회사에서 했던 업무 경력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특히 회사의 대표는 디자인보다 MD로서의 경력에 더 호기심을 갖는 듯했다. 업체를 직접 컨택해 제품을 소싱해 본 경험이 있는지, 어느 정도의 판매 실적을 기록했는지, 유통업에서 쌓은 경력을 살려 왜 창업을 고려하지 않았는지 등을 연이어 물었다. 디자이너라는 명찰을 달고 있음에도 여전히 영업인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과거 이야기를 생각보다 길고 구체적으로 풀어낸 후 잠시 숨을 고르던 순간, 대표의 한마디가 내 귀에 크게 박혔다.
자기소개서를 오랫동안 정독했어요.
그 말에 나는 놀란 눈으로 대표를 바라보았다. 내 지원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던 그가, 자기소개서의 헤드라인과 소제목, 특정 문구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솔직히, 관심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원자의 자기소개서를 이렇게까지 꼼꼼히 읽어주다니. 게다가 정독이라는 표현을 쓰다니. '구직 서류'와 '정독하다'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조합이었던가.
새삼 놀라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무척 기뻤다. 아마도 그 순간 내 안에는 두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내가 의도한 대로 글이 전달되었다는 만족감, 그리고 또 하나는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다는 뿌듯함.
40분 간의 면접을 무사히 마친 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택시에 올랐다. 마치 참석자가 많은 대형 회의를 가까스로 끝낸 것처럼 극심한 피로를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정신만큼은 맑았다.
디자이너로서의 첫 면접을 과연 잘 끝낸 걸까? 택시 시트에 몸을 기댄 채 하루를 반추해 보았다. 면접에서 했던 말, 대표의 반응, 내 대답의 아쉬운 부분까지 하나하나 떠올리던 중, 생각의 끝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다.
'근데 나는 글쓰기를 왜 계속했지?'
말보다 글이 좀 더 편해서,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내 감정을 정리할 수 있어서, 딱 맞는 단어를 찾아낼 때의 희열이 좋아서ㅡ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잊고 있던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글을 통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사실. 잠시일지라도, 어떤 사람과 조용히 연결되는 그 감각을 나는 글 쓰는 행위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겼다. 회사 대표가 건넸던 한마디가 여전히 내 안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디자인 면접을 본 것인지, 아니면 영업직 면접을 본 것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헷갈렸지만, 깊이 파고들 시간은 없었다. 내일은 또 다른 면접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