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리,
미간 좀 펴고 일해
홈쇼핑 MD로 일하던 시절, 팀장님으로부터 종종 들었던 말이다. 처음엔 의아했다. 내가 방금 미간을 찌푸렸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색한 웃음을 짓고 이내 표정을 풀었지만, 잊을 만하면 다시 듣게 되니 나중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거울을 보며 일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미간까지 제어할 수 있단 말인가. 특히 그 소리를 들을 땐 실적 데이터를 살펴보거나 상품 정보를 방송 관리 시스템에 입력해야 할 때와 같이 내가 무언가에 몰두를 하던 순간이었다. 집중할 때 나오는 버릇인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팀을 이동한 후 같을 층을 쓰던 상무님도 같은 지적을 하자, 나도 모르게 '미간에 투명 테이프라도 붙여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통제할 자신이 아무래도 없었으니까.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후, 자기 얼굴의 미간 하나 관리하지 못했던 사람은 회사 대표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게 된다.
부담될 것 같아.
적당히 해도 괜찮아.
놀랍게도, 편집 디자이너로 입사한 지 삼일 만에 들은 말이다. 활활 타오르던 내 업무 열정을 사장이 눈치채고 우려를 표한 것이었다. 초반부터 열정을 불태우다 금방 지치지 말고 적당히 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때의 난 말 그대로 '불꽃' 같았다. 누가 불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혼자 맹렬히 솟아오르던 불꽃. 일단, 출근을 해서 엑셀이 아니라 일러스트를 실행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했다. 어쩐지 내가 디자이너가 되었음을 가장 분명하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테스트 삼아 대표가 맡긴 작업 매뉴얼 디자인에도 온 정성을 쏟았다. 시키지 않아도 들어가야 할 텍스트 원고를 정리했고, 아주 사소한 부분을 신경 쓰느라 오래 골몰했다. 회사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집으로 가면서도 오늘 마무리 짓지 못한 작업이 머릿속에 아른거릴 정도였다.
사실, 이렇게 한 가지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막 사업을 키워가는 3년 차 신생회사라 상대적으로 일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외부 영업과 납품을 도맡았던 대표가 자주 외근을 나가면서 내 작업에 간섭하는 사람도 없었다. (설령 상주했다 해도 디자인 작업에 관여할 스타일도 아니었다.) 덕분에 자유로운 환경에서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새 회사의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느냐 하면,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대와 어긋나는 점이 더 많았다.
우선, 디자인실을 독점하고 싶었던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납품으로 인해 매장 직원이 부재할 때는 손님 응대가 필요하다는 이유였고, 처음엔 기존 직원과 친분을 쌓는 것이 좋겠다는 사장의 판단도 작용했다. 결국, 내 근무 공간은 디자인실이 아닌, 100kg에 육박하는 인쇄 장비가 중앙을 차지한 매장이 되었다. 그것도 매장 관리를 담당하는 직원의 책상과 맞닿을 만큼 가까운 자리로.
출발이 조금 어긋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혼자 디자인실을 쓸 수는 없어도 바로 옆자리에 앉은 직원의 활발한 에너지 덕에 긴장이 금세 풀어졌고, 대표 또한 충원하는 대로 자리를 재배치할 것이라 했으니 시간이 해결하겠거니 낙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문제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그건 다름 아닌 인쇄소에서 매일 울려 퍼지던 소리였다. 기계가 가동될 때마다 공간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굉음이 쏟아졌다. 철판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 종이가 빠르게 말려 들어가는 소리, 일정한 리듬으로 내부의 부품들이 맞물리는 소리, 잉크 묻은 종이가 배출 트레이에 밀려 나올 때 나는 소리까지. 각기 다른 소음들이 뒤섞여 마치 공장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소음뿐만이 아니었다. 기계가 돌아갈 때마다 공기 중에는 특유의 잉크 냄새가 퍼졌고, 미세한 종이 가루가 떠다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입사 첫날 귀마개를 챙겼고, 두 번째 날 KF94 마스크를 챙겼지만 요란한 소리와 특유의 화학 냄새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럼에도 일은 해야 했다. 대표가 부탁한 매뉴얼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디자인 업무를 대비해 기존 작업들도 틈틈이 훑어봐야 했다. 출력기에서 나는 갑작스러운 철컥 소리에 손이 멈추고, 종이가 빨려 들어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움찔했지만, 신기하게도 매뉴얼 디자인 작업을 시작하면 그 소음들이 잠시 흐려지는 듯했다.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어도 데시벨이 한층 낮아진 느낌이랄까. 화면 속 레이아웃을 조정하고 색상을 맞추는 데 집중하다 보면 주변의 소음도, 공기 중의 잉크 냄새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외부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 에너지 누수를 완전히 막을 순 없었어도 눈앞의 것에 내가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는 자각만으로도 어쩐지 소리를 견딜 힘이 났다.
그렇게 소음의 향연 속에서 작업하던 내게, 처음으로 '디자인다운' 작업이 주어진 건 입사한 지 보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의 첫 번째 디자인 미션은 실제 거래처에서 매년 의뢰하는 추석 감사 카드 디자인이었다.
고객사 담당자가 전달한 참고 이미지와 삽입되어야 할 문구는 단순했지만, 막상 일러스트의 새 아트보드를 보자, 긴장부터 됐다. 감사 카드 작업은 처음이었고 고객이 원하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디자인 또한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결국, 디자인 요소를 제공하는 리소스 사이트에 얼굴을 박고 동양적인 배경을 찾는 일부터 시작했다. 수십 개의 레퍼런스를 찾아 한지 질감과 먹으로 쓴 듯한 표지 시안을 만들었고, 전통 문양과 명조체 서체를 활용해 내지까지 통일된 분위기로 완성했다.
15cm도 되지 않는 아담한 카드 한 장을 디자인하는 데 걸린 시간, 무려 네 시간. 그날 오전을 거의 통째로 들여 만든 초안을 이제는 보낼 차례인데, 30대 중반의 신입 디자이너는 선뜻 용기 내지 못했다. 처음으로 해 본 디자인이라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괜찮은 걸까? 고객이 원하는 느낌이 맞을까? 고민만 하면서 머뭇거렸다.
결국, 외근을 다녀온 회사 대표와 옆 자리 직원의 독려에 힘입어 간신히 초안을 첨부한 메일을 보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겨우 디자인을 넘긴 나와는 달리, 담당자의 회신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도착했다. 그것도 다섯 가지 수정 사항을 포함한 상태로.
다행히 요청 내용은 예상보다 단순했다. 표지에 넣은 '새' 오브젝트를 '달' 이미지로 교체하고, 배경색을 옅은 갈색에서 흰색으로 바꾸는 정도였다. 의외였던 건 다섯 개의 수정 사항 중 세 개가 문구 수정이 이었다는 점이다. 기존 문장을 변경하거나, 특정 단어를 강조하기 위해 폰트 크기를 조정해 달라는 식의 간단한 요청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내가 동양적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배경의 질감과 먹 번짐 효과를 찾는데 집중한데 반해, 정작 디자인 의뢰인은 전달해야 할 텍스트의 정확성과 처음 의도한 스타일이 잘 구현되었는지를 더 중요하게 보고 있었다. 큰 변경 사항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디자인 작업자와 클라이언트의 시선이 다를 수 있음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한 뒤 제출한 수정안으로 마침내 디자인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실물로 인쇄된 감사 카드를 손에 쥐었다. 불과 석 달 전, 학원의 현장 학습을 통해 모니터 상에 있던 이미지를 인쇄물로 마주했었으면서도 다시금 감격이 밀려왔다. 그때는 새 업계에 도전하며 낯선 작업을 끝마쳤다는 성취감이 컸다면, 이번에는 내 디자인이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달될 '상품'이 되었다는 점에서 묘한 감동이 있었다. 박스에 차곡차곡 쌓인 100여 장의 카드를 보며, 비로소 내가 만든 것이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실체를 가진 무언가로 완성되었음을 실감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진심으로 만족했던 건 온전히 나의 힘으로 결과물을 완성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던 것 같다. 내 소유라 말할 수 있는 조용한 기쁨. 이러한 만족은 오랫동안 팀워크의 무대에 있던 내게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나에게 꼭 맞는 옷은 아니었지만, 상품기획자(MD)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역시 잊지 못할 성취의 순간들이 있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상품을 론칭하는 날, 주문 콜그래프가 막힘없이 치솟을 때가 그랬다. 높은 매출을 기록하며 목표금액을 초과 달성하던 순간은 그간의 노고를 잊게 만드는 짜릿한 보상이었다. 협력사 담당자부터 PD, 쇼호스트까지 서로 고생했다는 인사를 나누고, 편성팀과 다음 방송 일정을 조율하는 것도 그 과정의 일부였다. 예상보다 높은 매출이 지속될 때면 협력사 실무자나 제작팀과 회식을 하며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함께 만든 결과물이었기에 모두가 성과를 공유하는 것이 당연했고, 그래서인지 영업인으로서의 기쁜 순간들은 늘 분주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흥분과 환호 속에서도 어딘가 붕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성과를 이룬 것은 분명 기뻤지만, 그 기쁨이 내 손을 거쳐 조용히 스며들기보다 사람들 사이로 퍼져 흩어지는 듯했다. 이에 반해 디자이너의 기쁨은 MD때와 달리 고요한 자축에 가까웠다. 아무 말 없이 완성된 결과물을 바라보며 홀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 형태랄까.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여운은 더 오래 남았다.
왜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까?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미간이 찌푸려지는 이유가 궁금해 챗 GPT를 소환했다. 그러자 똑똑한 AI는 5초도 되지 않아 세 가지 이유를 명쾌하게 정리해 준다.
집중과 시각적 피로: 집중할 때 눈을 더 세밀하게 사용하게 되며, 눈의 움직임을 더 많이 조절해야 합니다. 이로 인해 눈 주위 근육들이 긴장하게 되어 미간이 찌푸려지기 쉽습니다.
스트레스 반응: 집중하거나 긴장을 많이 할 때, 신체는 자연스럽게 긴장 상태로 전환됩니다. 미간 근육은 그 긴장의 일부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감정적 반응: 어떤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자극을 받거나 스트레스를 느끼면, 의식하지 않게 미간을 찌푸리기도 합니다. 이는 뇌가 감정적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미간 지적을 했던 상무님께 어색한 미소를 띠며 '집중해서 그래요'라고 답하곤 했는데, 다행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몰두할수록 무의식적으로 얼굴이 굳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신기하게도 MD를 그만두고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하면서는 같은 지적을 듣지 못했다. 집중하는 순간이 줄어든 걸까? 아니면 이제는 몰두할 때도 굳이 얼굴 근육을 긴장시키지 않는 법을 터득한 걸까? 어쩌면, 내게 맞는 일에서는 애써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