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소리여도 어쩔 수 없습니다.

by 슥슥

수월했다. 어제 미리 해둔 덕에 일도 별로 없었고 마음만 먹으면 딴짓을 할 정도로 여유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달라진 게 없었다. 출근한 순간부터 두 가지 말, 그러니까 ‘혼자 있고 싶다’와 ‘퇴사’라는 단어만 떠올렸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향해 ‘번아웃’이라고 말했다. 흔해 빠져서 이제는 나약한 핑계처럼 들리는 단어. 그 짧은 세 음절에 이 복잡한 마음을 다 압축할 수 있을까?




내가 정한 데드라인은 올해 말까지. 겨우 5개월 남짓 남았다. 그런데도 엉덩이가 들썩여서 참을 수가 없다. 끝 지점에 왔다 생각하니 긴장이 풀린 건가. 시간이 흐를수록 왜 이렇게 회사에 있는 나를 견딜 수가 없는지 모르겠다.




그런 마음으로 9시간을 앉아 있다 회사를 나왔다. 퇴근 후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우습게도 골목 사이사이로 몸을 숨기는 일이다. 회사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경로만 찾아다니는 것이다. 공감받을 수 없는 행동이란 건 안다. 하지만 회사라는 공간에서 하얗게 표백된 내가 색을 다시 찾으려면 이렇게라도 필사적으로 사람을 피해야 한다.




버스에 올라 떼꾼한 눈을 겨우 떠 바라본 건 다시 책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디오북) 밀리 앱에서 본능적으로 ‘퇴사’라는 단어를 조회했다. 역시나 관련 에세이가 차고 넘치게 많이 나온다. 용기 있게 경로 이탈을 택한 이들은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 마음으로 고른 책이 <요즘 것들의 사생활>이었다. 회사 밖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과의 인터뷰집. 이제 겨우 두 명의 이야기를 들었건만 마음이 요동쳤다. 나와는 다른 상황,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라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알아도 자꾸 퇴사 의욕이 솟구쳤다.




구구절절 사연은 길지만, 지금껏 용기 내지 못한 이유는 사실 두 가지다. 하나는 ‘모아 놓은 돈이 줄어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전 실패 후 회사로 돌아오는 게 끔찍해서'다. 책을 읽어도 두 가지의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읽을수록 최악의 상황을 더 상세히 기록하고 싶어졌다. 오히려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을 최대치로 끌어모으고 싶었다. 그걸 눈으로 인지해야 감내할 수준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다. 집에 오자마자 노트북을 펼쳐 막무가내로 적어보았다.




<퇴사 후 발생할 수 있는 상황>

스스로 정한 루틴이 틀어져서 게을러질 수 있다.

게을러진 내 모습에 자책 + 후회 + 두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

조급한 마음에 수익형 블로그, 수익형 포스팅을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추정했던 예산보다 더 많은 돈이 지출돼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생각지 않은 집안의 문제,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해 비용 예측이 틀어질 수 있다. (예산 초과)

글과 관련한 100번의 시도를 하는 게 목표인데 100번 모두 실패할 수 있다.

1년간 경로 재정비 시간+휴식을 가졌는데도 현실적인 이유로 홈쇼핑계로 재취업할 수 있다.

재취업을 위해 업무 감을 잃은 상태로 이력서, 포트폴리오, 경력기술서를 쓸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의 오지랖 + 걱정 + 비웃음을 듣고 낙담할 수 있다.

주변 지인들의 좋은 소식을 듣고 상대적 박탈감에 빠질 수도 있다.

내 일정과 계획이 여러 변수로 인해 후 순위로 밀릴 수 있다.

예상과 다른 모든 변수에 대한 스트레스 강도가 클 수 있다.

백수 생활 6개월 차에 갑작스레 불안과 두려움 등 각종 부정적 감정에 압도될 수 있다.

의지박약의 나와 반복적으로 대면해서 더 큰 좌절에 빠질 수 있다.



적고 나니 이 중에서 통제할 수 있는 건 하나란 생각이 든다. '나의 감정'

어떤 상황이 와도 그걸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재정의하느냐에 따라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감정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인가?









이 질문에 자신이 없다면 딱 5개월만 더 버텨서 목돈을 더 쌓고 나가는 게 합리적일 수 있다. 아니면 인내심을 발휘해 지금처럼 회사와 병행하며 부업을 이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흔들린다. 이성적인 판단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이에 관해 수 백 번을 되뇌고 있으면서도 자꾸 거부감이 든다. 체력적으로, 심리적으로 한계점에 와 있는 건지 튕겨나가고 싶은 마음이 온몸에 가득하다. 자극적인 음식으로 잠깐의 희열을 맛보려 해 봐도 잃은 기력과 찌푸려진 미간이 여간해서 잘 펴지지 않는다.




기분을 전환하려 정반대의 것을 적어보았다.



<퇴사 후 해보고 싶은 것>

휴식

지방 북스테이 해보기

학교 도서관에서 보고 싶은 책 마음껏 보기 (장르 불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원하는 대로)


그 외 해야 할 것

글 관련해서 도전 100개 해보기. 플래너에 실패/성공 날 것 그대로 기록할 것. (몇 번쯤에서 성공 경험이 나올지 궁금함. 100번 다 실패할 수도 있다고 봄. 도전의 예: 글쓰기 공모전, 기고, 브런치북완성, 브런치 매거진 연재 등 가짓수 계속 뻗어나가기)

티스토리 블로그에 꾸준히 발행할 정보성 콘텐츠 기획 & 실천해 보기 & 카카오뷰 활용

내일배움카드제로 평일 수업 배우기

블로그 리뉴얼 (콘셉트/디자인 모두)



10년간 다닌 회사를 박차고 나와 하고 싶은 것들을 나열해 보았는데 10개가 채 안 된다. 대단한 과업을 위해 퇴사하는 게 아니라 좀 허망한 기분이 들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내 결정이 분명해진다. 이 사소한 것들 때문에 포기할 수 있는 거라면 애초에 내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 덧

후우. 생각이 복잡할 땐 이렇게 토해내야 살 것 같다. 회사 pc 앞에서는 물 주지 않은 식물처럼 시들어가던 내가 집 노트북 앞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눈에 불을 켜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니.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을 넌지시 말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싶은 밤이다.





get-me-out-g708ab02ca_640.jpg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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