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님, 이제야 답장을 해요. 핑계를 대자면 개인적으로 좀 무거운 결정을 한 후 수습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아직 뒤처리가 남아있지만 더 늦어질 수 없어 부랴부랴 편지를 씁니다.
커리어 전향을 모색 중인 요즘이라 삶의 이정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윤슬님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였어요. 저도 막막한 미래를 향해 어떻게든 가야 하는 현실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면서 여기에 대응하는 방법이 조금씩 달라진 것 같아요.
과거의 저라면 낯선 것이 두려워 불안을 꼭 쥐고 웅크린 채 생각에만 파고들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눈앞에 닥친 것부터 일단 해치우게 되었거든요. 사실, 두 가지 모두 정답이라고 할 순 없어요. 과거에는 관념에만 몰두해 실천이 더뎠고 그 이후엔 방향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느라 급급했으니까요.
정반대의 시행착오를 겪은 후, 최근엔 생각과 행동 사이의 적당한 균형을 고민 중이에요. 방향을 고려한 실천이 쌓여야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결정을 한 데에는 책 <그냥 하지 말라>의 영향이 컸어요.
예전에는 성실히, 꾸준히, 열심히 하는 자세를 높이 샀어요. 지금도 그런 면이 있죠. 그런데 로봇 R대리는 잠을 안 잡니다. 밥도 안 먹고 3교대도 필요 없어요. 월급을 올려달라는 말도 안 하고, 결정적으로 R대리는 오류를 내지 않습니다. 이렇게 동일한 업무를 꾸준히 하는 분야는 로봇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농업적 근면성으로 열심히 일했던 이들의 꾸준함은 더 이상 덕목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생각 없는 근면성은 조만간 주인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제 블로그에도 독서 후기를 남겼고 윤슬님이 다정한 댓글까지 남겨주었던 책인데요, 조급한 마음에 막무가내로 뭘 하려고 할 때 이 책의 문장들을 떠올리며 설익은 열정을 식혀주고 있어요.
윤슬님도 여러 갈래의 길을 걸었다고 하셨는데요. 너무 많은 시행착오로 완전히 녹초가 되기 전에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방향을 고민해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최근 저에게 위안이 되었던 짧은 문장 하나를 공유해볼게요.
내가 느리다고 생각했던 그 속도가,
내가 지루하다고 여겼던 그 속도가
사실은 나를 안전하게 해 줬을 수도 있다.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
Q. 슥슥, 글벗의 소소한 행복은 무엇인가요?
제 소소한 행복이 뭘까 떠올려보다 문득 요즘 꽂혀있는 단어가 생각났어요. 그건 바로 ‘무탈하다’ 예요. 저는 이 감각을 보통, 밤 10시나 11시쯤 침대에 누워 좋아하는 책을 읽다 뭔가를 끄적일 때 느끼곤 해요. 별 탈 없이 하루를 보내고 좋아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격스러워하면서 말이죠.
역시나 저도 글벗처럼 행복 요소에 책과 글쓰기가 빠지지 않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책과 글쓰기는 일종의 ‘애착 인형’ 같기도 하네요. 옆에 꼭 붙어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니까요. 어린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애착 인형과 멀어지지만 어쩐지 저희는 갈수록 두 가지 인형(책, 글쓰기)에 더 붙어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성장을 덜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 말이에요.
윤슬님의 최근 소식도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