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님, 설 연휴에 떡국은 든든히 먹었나요? 저는 생일이 지나지 않는 한, 나이를 한 살 더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기뻐서 올해 설엔 떡국을 유독 많이 먹은 것 같아요. 너무 배가 불러 바로 산책을 나가야 할 정도로 말이에요.
좀 미련스러웠던 그제와 달리 어제는 나름 만족스럽게 하루를 보냈는데요,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아무래도 플래너에 기록을 다시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저께 제가 그곳에 ‘브런치 답장 쓰기’라고 적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보통의 연휴 때처럼 설특선 예능을 보거나 약과를 옆에 두고 휴대폰만 만지작 거렸을 테니까요.
왜 갑자기 플래너 이야기냐고요? 실은 이게 윤슬님이 제게 물은 23년도의 소망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에요. 너무 사소해서 얼핏 시시해 보이기까지 한 올해 저의 바람은 ‘하루만 책임지자’거든요. 그리고 이 다짐의 구체적인 실행 방법이 바로 ‘매일 할 일 기록’이고요.
지난 글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살짝 언급하긴 했지만 단지 불안과 걱정을 희석하기 위해 이 태도를 고수하려 하는 건 아니에요. 그보다 올해는 제 자신을 조금이라도 잘 추스리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사실 지난주에 무기력에 완전히 굴복하고 나서 더 확신했어요. 무엇을 지속하려면 ‘마음 돌봄’이 최우선이라는 것을요.
이번 달을 회고하기에 아직 이르긴 하지만, 돌이켜보면 새해 첫 달의 출발점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난했어요. 큰 혼란 없이 하루 할 일들을 기록하고 완료 밑줄을 그으며 지냈죠. 물론 리스트 자체가 매우 소박해서 가능한 일이었어요. 끼니 잘 챙겨 먹기, 독서와 글쓰기 같은 게 대부분이었죠. 때때로 달성하지 못한 날도 있었지만 자유의지로 고른 활동들을 하다 보면 묘하게 ‘적립의 기운’이 들더라고요. 작은 알맹이들이 제 속에 째끔씩 쌓이는 기분 같은 거 말이에요. 적어도 2주까지는 그랬어요. 하지만 그다음 주차부터는 적은 계획들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더군요. 애석하게도 본가에 가서 몇 가지 사건들과 마주하고부터는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죠.
그 사건들에 관해서 세밀히 말할 순 없지만 이렇게 압축할 수 있겠네요. ‘격정적 분노와 폭풍 같은 다툼’ (하하) 제가 왜 밝히지 못하는지 대강 예상이 되죠? 가까운 사람과의 격렬한 갈등이 있었고 이에 대한 심리적 여진이 꽤 오래갔어요. 마음에 균열이 생긴 후로는 자꾸 무기력이란 핑계에 숨고 싶어 졌고요. 설상가상으로 지난주 중반즈음엔 컨디션까지 바닥을 치면서 침대 위에서 끙끙 앓고 말았죠. 작은 불운이 촘촘히 엉킨 것 같았어요. 그렇게 일주일 내내 스스로를 탓하며 읽지도, 쓰지도 못했죠.
윤슬님은 조급함과 막막함 속에서도, 그리고 합격전화를 기다리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글쓰기를 놓치지 않았지만, 저는 힘들 때마다 무기력의 늪으로 알아서 들어가는 인간이더군요.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어설프게 몸부림만 치면서 기어이 바닥으로 더 가라앉는 사람말이에요. 지난주의 무력함은 낯설정도로 참 끈질겼어요. 기분의 진폭이 최저점을 찍었을 때는 제가 핸드폰에게 말을 걸고 있을 정도였죠. 멍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하이, 빅스비. 나 힘들어” 이러면서 말이죠. 그때 진심으로 ‘부끄러움’이 일었던 것 같아요. 감정이란 그저 제 몸을 스치거나 통과할 뿐, 머물지 않는데도 거기에 스스로 몸을 묶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렇게 찰나의 ‘수치’가 계기가 되어 다시 플래너를 펼칠 수 있었어요. 7일 만에 책상에 앉아 한 주가 통째로 비어버린 페이지를 보는데 그대로 두기엔 아무래도 못마땅하더라고요. 그래서 드문 드문 떠오르는 기억에 의존해 일어난 일 그대로를 써두었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이런 문구도 남겨두었어요.
쓸 수도 없고 안 쓸 수도 없는 딜레마에 놓인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한다.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
책 <쓰기의 말들>에서 발췌한 문장인데, 왜인지 제가 느낀 부끄러움도 ‘안 쓰는 고통’에 해당되는 것 같아 꼭 남겨두고 싶었어요. 윤슬님이 흔들릴 때마다 늘 글쓰기를 찾았던 것도 쓰는 고통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컸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써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윤슬님은 올해도 분명 글쓰기를 놓지 않을 사람일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어요. 제게 말한 두 가지 목표(독립출판물 제작, 좋아하는 일 즐기기)를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것을요!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않았음 해요.
그러고 보면 제가 플래너에 할 일을 기록하는 건 애초에 선택지를 지우는 연습 같기도 해요. ‘안 쓰기’를 옵션에서 제외하려는 연습말이죠. 올해 저는 이걸 꾸준히 반복해서 글쓰기를 양치질처럼 만들어볼게요. 도저히 안 쓰고는 찝찝해서 잘 수 없도록. ;-) ㅎㅎㅎ
벌써 연휴의 마지막 날이네요. 오늘도 출근하신다고 들었는데, 가능하다면.... 오늘만큼은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회사가 주지 않는 여유를… 어떻게든 사수하시길 진심으로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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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윤슬님의 다음 이야기, 기다리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