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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Sep 17. 2020

숨 | Exhalation (1)

테드 창 두 번째 단편집 


4번의 휴고상, 4번의 네뷸러상, 4번의 로커스상을 수상한 테드 창의 두 번째 작품집이다. 

2002년  『당신 인생의 이야기』 를 출간한 이래 17년 만에 펴낸 이 소설집에는 로커스상, 휴고상, 영국과학소설협회상을 수상한 표제작인 「숨」을 비롯해 버릴 것 하나 없는 작품들이 가득하다. 


관통하는 주제는 자유의지와 결정론, 그리고 기술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다. 자유의지란 존재하는가. 우리의 삶이 결정되어 있다면 선택과 행동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는 기술로 변화하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첫 단편의 배경은 바그다드다. 상인 압바스는 시장 골목에 새로 생긴 가게에서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세월의 문’을 보게 된다. 출장 간 사이 무너진 모스크 벽에 깔려죽은 아내 나쟈를 살려낼 방법이 있을까 희망을 갖고 출발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벽이 무너진 후에야 도착하게 된다. ‘세월의 문’을 만든 바샤라트의 말대로 과거를 바꿀 순 없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그의 집 앞에서 나쟈의 임종을 지켜본 간호사를 만나 아내의 전갈을 받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남편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짧은 일생이었지만 함께 보낸 시간 덕분에 행복했다고 하셨습니다. 


출장을 떠나는 날 나쟈와 다툰 압바스는 마지막으로 본 아내의 눈동자에 비친 고통 때문에 마치 자기가 아내를 죽인 듯한 죄의식에 시달리며 20년을 보냈는데 이 말을 듣고 해방의 눈물을 흘린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나에게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딱히 바꾸고 싶은 건 없다. 항상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는 선택을 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한 선택들로 여기까지 왔고 실패한 경험은 실패한 대로, 괴로운 경험은 괴로운 대로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조금은 다른 마음가짐으로 살아보고 싶다.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그렇게 외면하지 않고, 완벽해야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줄 거라는 생각으로 항상 긴장 상태로 살지 않았다면 같은 경험 속에서도 더 많은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숨


이 작품집의 대표작이지만 가장 어려운 작품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폐만 기계로 대체해서 살아가는 인간의 세상을 그린 줄 알았는데 인간도, 지구도 아닌 세상이라는 걸 인지하고 나서야 이해가 갔다. 「숨」의 세상은 매일 공기를 채운 허파 두 개를 소비하고 다 쓴 허파는 충전소에 가서 새 허파로 교환하는 세상이다. 뇌의 기억 구조를 연구하는 해부학자인 주인공은 세상의 모든 탑시계가 빨라졌다는 기사를 접하고 뇌가 느려진 게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의 뇌를 해부하여 모든 하부 구조를 하나씩 떼어내 관찰한 끝에 공기는 단순히 동력이 아니라 사고가 각인되는 매체 자체라는 걸 알아낸다. 뇌를 구성하는 얇은 금박 조각들은 뇌에 공급되는 공기의 흐름으로 움직이는데 세상의 기압 차이가 줄어들면서 공기의 흐름이 느려지고 뇌의 움직임이 느려진 것이다.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공기가 균등하게 분배되는 방향으로 나아가 완벽한 평형 상태에 이르는 순간 종말이 온다는 것을 밝혀낸다.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 총량은 일정한데, 유용한 에너지를 사용하면 열과 같은 쓸모없는 에너지로 전환돼 결국 우주는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엔트로피 이론인 것이다.

archive.org


이 작품의 핵심은 종말을 받아들인 주인공의 행동에 있다. 주인공은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웃 주민들이 언젠가는 탐험을 올 거라 희망하며 기록을 남긴다. 


내 글을 읽는 행위를 통해, 당신의 사고를 형성하는 패턴들은 한때 나의 사고를 형성했던 패턴들을 복제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나는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당신을 통해서.


우리는 누구나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한다. 불멸의 꿈을 이룰 수 없는 대신 수명을 넘어서 영속할 수 있는 무언가를. 글로써 살아남고 싶은 욕구가 공감이 간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우리의 우주는 그저 나직한 쉿 소리를 흘리며 평형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딸의 죽음을 비롯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두 알면서도 행하는 것처럼, 미래가 정해졌다고, 바꿀 수 없다고 해서 무의미한 게 아니라는 작가의 생각이 담겨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과학 저널 네이처(Nature)에 게재된 글로, '예측기'라 불리는 자동차 키처럼 생긴 작은 기기를 소개한다. 예측기에는 버튼 하나와 녹색 LED 등 하나가 달려있는데 버튼을 누르기 1초 전에 LED 불이 들어온다. 그러니까 버튼을 누를 걸 미리 '예측'하고 깜빡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측기를 이겨보려고 강박적으로 가지고 논다. 


아무리 손놀림이 빨라도 1초가 지나기 전에 버튼을 누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버튼을 누르지 않을 결심을 하고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기다리면 불빛은 절대 반짝이지 않는다. 당신이 무슨 수를 쓰든, 불빛은 언제나 버튼을 누르기 전에 반짝인다.


예측기의 보급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정신병으로 입원한다. 모든 게 결정되어 있다면 내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먹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 말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하지만 나는 안다. 자유의지가 환상인 이상, 누가 무동무언증에 빠지고 누가 빠지지 않을지 또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 누군가는 굴복할 것이고 누군가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내는 이 경고는 그 비율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희망적인 메시지다.「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서도 다루겠지만 테드 창은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양립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가 미래를 바꿀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하는 선택과 행동이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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