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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Sep 17. 2020

숨 | Exhalation (2)

테드 창 두 번째 단편집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테크 회사인 블루감마는 데이터 어스 플랫폼에서 분양 받아 키울 수 있는 디지언트(digient)를 개발한다. 어린 아이에 가까운 지능을 탑재한 디지언트는 어떤 인풋을 넣느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양육이 가능해 창조자인 개발자들조차 그 잠재력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블루감마에서 일하는 애나와 데릭은 업무의 일환으로 디지언트를 키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여러 문제를 마주하는데 철학적인 고민을 잘 담고 있다.


블루감마가 경쟁에서 뒤쳐져 폐업하고 새로운 플랫폼인 리얼 스페이스로 디지언트들을 옮길 수 없게 되는 위기가 찾아온다. 얼마 남지 않은 디지언트 보호자들은 디지언트도 새 플랫폼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지만 쉽지 않다. 기술 발전으로 더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이 만들어져도 누군가는 혜택에서 소외되는 우리의 현실을 보는 것 같다. 멸종위기종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다양한 노력에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접근하는 건 바이너리 디자이어라는 섹스토이 회사다. 디지언트를 단순한 섹스돌이 아닌 인격을 지닌 섹스 파트너로 개발해 비즈니스를 창출하려는 계획이다. 디지언트에게 성적 보상 요소를 추가해 성적 존재로서 경험을 쌓고 자발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건 진짜가 아니라는 애나의 항변에 바이너리 디자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디지언트에 대한 여러분의 감정은 진짜이고, 여러분에 대한 그들의 감정 또한 진짜가 아닌가요? 여러분과 여러분의 디지언트가 성적이지 않은 진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인간과 디지언트 사이의 성적 관계는 왜 진짜가 될 수 없다는 건가요?


영화 <그녀(Her)>에서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테오도르의 감정이 진심이듯, 디지언트를 아끼고 사랑하는 애나와 데릭의 마음도 진짜고 디지언트들과 맺은 관계도 거짓이 아니다. 애완동물의 권리도 중요시되는 요즘 관계라는 게 반드시 인간 대 인간일 필요 없다는 건 이미 명백하다. 내가 몸담았던 회사와 맺은 관계를 보면 심지어 상대가 생명체로 국한되지 않을 수 있겠다 싶다. 


데릭은 디지언트들도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바이너리 디자이어의 제안을 디지언트 마르코와 폴로와 공유한다. 보호자들은 반대한다는 것도 함께. 그런데 마르코는 의견이 달랐다. 보상 맵을 수정해 성적 욕구를 추가하는 게 왜 나쁘냐고. 


데릭: 넌 그들이 뭘 하고 싶어하는지 이해를 못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마르코: 이해해. 자기들 좋아하고 싶은 거 나한테 좋아하게 만들려는 거잖아. 내가 그거 좋아하지 않아도.
데릭: 그런데도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야?
마르코: 왜 잘못? 내가 지금 좋아하는 거 다, 블루감마가 좋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좋아해. 그건 잘못 아냐.


일리 있는 말이다. 여기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떠올랐다. 계층에 따른 철저한 조기교육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믿고 산다면 그건 정말 유토피아일까. 행복이 절대적인 가치일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정의와 평등과 같은 가치도 절대불변의 가치가 아니라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마르코와 폴로는 인간이 아니므로, 그들을 마치 인간인 것처럼 간주해, 있는 그대로 놔두지 않고 데릭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일지도 모른다. 마르코를 존중하고 싶다면 그를 인간처럼 대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까?


그들의 문화와 전통에 따라 잘 살고 있는 원주민 부족에게 첨단 기술을 제공하는 게 그들을 도와주는 걸까. 전혀 다른 가치와 세계관으로 돌아가는 국가나 문화권을 우리 기준과 잣대로 평가하고 비판하는 게 맞는 걸까.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영국의 수학자 레지널드 데이시는 양육을 기계에게 맡기는 게 불완전한 교육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완벽한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기계식 자동 보모를 발명한다. 


아이들은 악덕에 물들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육아를 맡기는 사람들의 영향력을 받고 악덕에 물든다. 이성적인 육아는 이성적인 아이들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기계식 자동 보모는 결국 비즈니스로는 실패했지만 아들인 라이어널 데이시가 아버지의 주장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입양한 아들 에드먼드 데이시를 기계로 양육한다. 에드먼드는 두 살이 될 때까지 자동 보모의 보살핌으로 잘 자랐고 그 후 인간 보모에게 맡겨졌다. 이때부터 아이는 잘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요양병원에 보내진다. 간호사들의 보살핌에도 에드먼드는 왜소했고 정신박약 진단을 받았다. 새로운 시도가 행해진 건 에드먼드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다. 기계 팔과 자동 보모에 내장되어 있던 인터콤 시스템으로 말을 걸자 반응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에드먼드의 인지 능력은 지체되어 있지 않았고 단지 인간과 소통을 할 줄 몰랐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디지털 기기를 접하고 자란 세대는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이 더 편해진 세상이다. 통화보다 메시지를 주고 받는 게 익숙해진지도 오래다. 코로나로 비대면 접촉이 일상화된 지금, 앞으로의 의사소통은 어떤 형태를 띠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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