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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Oct 11. 2020

꿈이 이루어지다

런던을 향해

2020년 1월 4일 KE907 편을 타고 런던에 입성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도 않은 내 오랜 꿈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너무 오래, 간절하게 갖고 있던 꿈이라 오히려 얼떨떨했다. 내가 정말 런던에서 살게 됐다고?

런던 도착 다음 날 기쁨의 인스타그램 포스팅


영국에서 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실행에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 건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고서다. 고인이 된 저자는 암 선고를 받고 그 후 1년을 (체력적으로 불가능해질 때까지) 계속 의사로서 일을 하고 수술을 했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걸 알고 나서도 계속 회사에 출근한 셈이다. 회사를 재미로 다니고,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항상 생각하는 나에게도 이건 놀라웠다. 아무리 회사가 좋고 일이 재밌어도 내 삶이 1-2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과연 다음 날 출근을 할까? 짧은 삶이었지만 죽기 직전까지 하고 싶은 일을 이미 찾아 하고 있었던 저자가 부러웠다. 


책을 함께 읽은 북클럽 사람들과 만약 남은 생이 2년뿐이라면 (결과적으로 저자가 암 선고 후 살았던 시간) 어떻게 보낼 건지 공유했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난 그 중 1년을 영국에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내가 가진 영국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이렇게 큰 줄 미처 몰랐다. 


예전부터 런던에서 살고 싶다는 말은 많이 했다. 매년 여행을 가면 돌아오기 싫었고 출국 날에는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결혼해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꼭 국적은 확인하고 하라고 친구들이 신신당부했다.) 비자를 받을 수만 있다면 청소라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I'll sweep the floor if I could live in London.) 


막연한 꿈을 실행에 옮겨야겠다고 다짐을 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기회가 왔다. 에어비앤비 로컬리제이션 팀에서 APAC(아태지역)을 맡고 있었고 동료인 샘(Sam)이 EMEA/LATAM(유럽과 남미)을 담당했는데 샘이 퇴사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십여 년 회사 생활에서 샘만큼 마음이 잘 맞는 동료는 앞으로 다시 없을 거라는 걸 알기에 슬펐다. 샘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며 고생했는지 알기에 말릴 수도 없었고 샘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더블린 지사에서 일할 샘의 후임을 구하기 위해 채용 공고를 내고 채용 절차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해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땐 이미 에어비앤비 코리아에서 일한 지 3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아태지역을 관리하며 해보고 싶은 것, 배울 건 다 해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아시아 출신인 내가 유럽 팀을 관리할 수 있을까? 그 지역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전무한데? 내가 유럽 팀으로 옮기면 내 자리는 아시아 사람을 뽑나? 그럼 APAC팀도 아시아 사람, EMEA팀도 아시아 사람이 팀장이라고?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당시 내 매니저 살보(Salvo)는 입사한 지 불과 한 달밖에 되지 않았고 매니저의 매니저인 에이드리언(Adrian)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때였다. 에이드리언과 매주 있는 1:1 미팅에서 얘기를 꺼냈다. "Localization Manager EMEA 자리 관심 있는데, 지원해도 될까? APAC 경험밖에 없고, 게다가 내 후임도 아시아 사람을 뽑으면 뭔가 이상할 거 같은데..." 그러자 에이드리언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네가 두 팀 다 관리하는 건 어때?"


생각도 못한 발상이었다. 두 자리를 합쳐서 한 사람이 글로벌 팀을 관리한다... "그렇게 하면 팀을 Language Manager(언어 전문가)와 Program Manager(PM)로 구성할 수 있어 기능별(functional) 구성이 돼 회사 방향과 일치한다며 에이드리언은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갔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런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는데 내가 워낙 더블린을 좋아하지 않는 걸 알고 있는 터라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고. 내가 해보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물론 연봉과 비자 문제로 몇 달이 허비됐지만.)


커리어에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고 유럽 시장을 맡으면서 많은 걸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요소도 있었지만 더블린에서 50분이면 런던에 갈 수 있다는 게 매력 포인트였다. 마음만 먹으면 주말에 휙 다녀올 수도 있다! 샘이 퇴사한 2018년 6월부터 유럽 팀까지 관리하게 됐고 비자 문제로 공식적으로는 2018년 10월에 Localization Manager APAC & EMEA/LATAM이라는 직함을 달며 더블린 지사로 옮기게 된다. 그렇게 런던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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